주체의 해석학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됩니다. 왜냐하면 주체는 그 자체로서 진실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들은 여기서 영성을 정의하기 위한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야기시킵니다. 즉 이같은 관점에서 주체의 개심이나 변형 없이는 진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체의 개심과 변형은 상이한 형태하에서 행해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주 거칠게 말해서 이 개심은 주체를 현재의 신분이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활동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지극히 관행적으로 이 운동을 그 진행방향에 입각해 사랑(에로스) 활동이라 부르도록 합시다. 그리고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고 변형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형식은 작업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작업,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공들이는 작업, 자기 수련이라는 장기간의 노력 속에서 자신이 그 책임을 지는 자기에 의한 자기 자신의 점진적 변환입니다. 에로스와 아스케시스는 서구의 영성에서 결국 진실이 가능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변형시키는 방식을 만들어 내는 두 주요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성의 두번째 특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영성은 진실에의 접근이 시작되었을 때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행해진 영적인 절차들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다른 것에 상당하는 효과, 즉 주체로의 진실의 '귀환'이라 부를 수 있는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영성에 있어서 진실은 주체의 인식 행위에 보상을 하고 또 이 인식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주체를 개명시켜주는 것입니다. 진실은 주체에게 지고의 복락을 부여합니다. 진실은 주체에게 영혼의 평정을 가져다 줍니다. 요컨대 진실과 진실에의 접근에는 주체 자체, 즉 주체의 존재를 완결시키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간략히 말해 영성에 있어서 인식 행위는 개인이 아니라 주체 존재 내에서 주체 자신에 의해 준비되고 함께하며 이중화되고 완수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 결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것들에 대해 엄청난 반론이 존재할 수 있고 또 후에 재론해야 할 엄청난 예외인 영적 인식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영적 인식과 모든 영지주의 운동은 인식 행위에 지나친 부담을 지우고 또 실질적으로 진실에의 접근에서 인식 행위에 지상권을 부여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식 행위에 영적 행위의 모든 조건과 구조를 과중하게 부과합니다. 요컨대 영적 인식은 영적 경험의 모든 조건, 형식, 효과를 인식 행위 내에 옮겨 바꾸어 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고대라 칭할 수 있는 전시대에 걸쳐, 또 아주 상이했던 방식들에 입각해 '진실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문제와 영성의 실천(진실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주체의 존재에 필요한 변형) 같은 두 문제와 테마는 결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자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게도 명백히 분리된 것이 아니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있어서도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에피멜레이아 오토(자기 배려)는 정확히 영성의 조건 전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기 변형의 총체를 지시합니다. 따라서 고대 전반에 걸쳐 철학의 테마(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것인가?)와 영성의 문제(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주체의 존재 내에 어떤 변형을 가해야 하는가?)는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예외는 고대에서 유일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절대적인' 철학자라 불리는 자의 예외입니다. 철학자들 중의 철학자인 그에게 영성의 문제는 거의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근대적 의미에서 철학의 창시자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하지만 익히 알고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의 정점이 아니라 고대의 예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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