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_자크 비데_배세진 역_오월의 봄_2020
근대 노동자의 세 가지 신체
'가치' 개념의 '생명정치'적 내용 - 생산 일반, 즉 '노동 일반'의 수준인 L1 - (생산 일반의 논리가 아니라) 상품생산의 논리, 즉 그 자체로 광대한 역사적 시기에 걸쳐 있는 L2 - (특정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인 L3
1. L1: 노동-하는-신체 일반 (생산 일반)
'인간학적' 소여로서의 '노동 일반'. 인간에 대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에 따라, 여러 다양한 시대에서 우리는 '노동'이라는 실천의 한 유형을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의 합리성이란 바로 최소한의 시간 안에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며, 이때 시간은 노동력 지출의 시간이라 이해된다. (...) 마르크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회적' 신체. 이 '사회적' 신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생명 속에서 항상 독특한 신체들이지만, 또한 사회적 앙상블 내에서 항상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위치해 있는 각자의 독특성을 지닌 신체들이다. (...) L1에 위치한 이 '로빈슨 크루소 신화'는 항상 인간의 노동이란 것이 특수한 사용가치를 향하는 구체적 노동임과 동시에 노동력의 지출로서의 추상적 노동이라는 점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노동은 상품생산 내에서, '가치'라는 개념성 즉 L2 내에서 발견하게 되는 모든 '결정 요소들'을 이미 지니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다양한 '생산양식들' 속에서 '노동력의 지출'을 발견하게 된다. '가치'는 노동력의 지출이 하나의 '사회적 특징'을 취하자마자 우리가 그러한 모든 사회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특수한 역사적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경제는 항상 사회적 목적들의 체계(생명의 요소들로서의 사용가치들, 즉 생존을 위해 반드시 생산해야 하는 사용가치들의 체계)와 이 체계가 전제하는 노동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이 점에서 경제는 곧 정치이다. 경제는 사회적으로 노동하는 신체, 즉 권위와 복종, 강제와 저항이라는 관계들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적으로 노동하는 신체를 대상으로 한다.
2. L2: 상품적인 노동-하는-신체 (상품생산)
노동의 일반적인 특징, 즉 노동 강도(=노동 생산성의 유사물), 노동 숙련도(이미 상품적인-노동-하는-신체는 그 보철물, 도구, 기계 - 이들은 상품적인-노동-하는-신체-를 연장하며, 이들 덕택에 신체는 자연적 힘의 과정 내에 기입되는데, 이 신체는 자기 자신을 문화적으로 구성되었으며 경쟁적 관계 내에서 끊임없이 재활용되는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과정의 단순한 한 계기로 구성함으로써만 이 보철물,도구,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다 - 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노동 능숙성(다소 거대한 '노동 생산력'으로서의 노동 생산성이라는 틀 안으로 통합되는 세 번째 항. 특히, 젠더적 문화를 자연적이라고 가정되는 성향들 안에 뒤섞어버리는 그 특유의 방식 때문에 상당히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이 특수한 방식으로 발현되는 지점으로서의 상품적 생산 논리
상품을 생산하는 '상품적-신체'란 도대체 무엇인가? 상품생산자로서의 노동자 전체.
L2에서 노동 생산성이라는 문제 설정의 핵심은 자신의 또 다른 차원, 즉 구체적 노동의 차원과 기술적 대립의 차원 - 이 또 다른 차원에, 자신이 활용하는 기술을 체화하는 인식하는 신체가 관여한다-에 따라 상품적 대립을 정의하는 것이다.
3. L3: 임노동-하는-신체 (자본주의적 생산)
경제적 규정에 관한 이론적 전개 속에서, 노동력의 지출에서 노동력의 소비를 향한 '이행'이, 그러니까 사회적 관계의 '변형'이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실현된다.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소비'라는 주제, 본질적 개념임에도 <자본>을 다루는 철학적 주석이 무시하곤 하는 이 주제의 생명정치적 의미에 대해 질문해 보아야 한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노동 과정은 자신이 구입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소비에 지나지 않는다". 착취는 최종적 감산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능동적 강탈 과정 또한 구성하고 있다. 착취는 노동자로 하여금 기술적 합리성과 신체적 강도의 관점에서 '생산적으로' 노동하게 만든다. 이는 푸코의 '통치성' 같은 하나의 '타동적' 과정이다.
노동강도는 구성적이다. 노동 강도는 이 추상적 노동의 '구체성'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노동 내에 관여된 생명을 말이다. 바로 이 생명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단순히 '사회적 필요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게 된다. 노동 강도는 자연적인 시간적 기간을 탈자연화하며, 동시에 동질적인 자연적 시간의 추상에서 이 시간적 기간을 분리시킨다. 왜냐하면 노동 강도는 자본가와 임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계급 투쟁 내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시장에서 자본으로의 이행'을 '노동력의 지출로부터 소비를 향한 이행', 다시 말해 생명정치로의 이행으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만 이를 이해할 수 있다.
(p.101~)
2/ 성별화된 신체, 아동의 신체, 외국인의 신체
아렌트를 통해 알튀세를 다시 읽어보자면, 이러한 '호명'은 국민이라는 엄격한 울타리 안에서만 울려 퍼진다. 물론 이 국민적 공간은 여전히 다공적이다. 특히 이 국민적 공간은 계약적이라고 가정된 관계 내부에 또 하나의 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바로 마르크스가 특별히 한 부분을 할애했던 주제인 여성과 아동에 관한 공간이다. 마르크스는 "기계화를 통한 자본주의적 고용"이 가족 수입을 현저히 증가시키지는 않으면서 여성과 아동을 시장으로 난폭하게 던져넣는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인격들 사이의 계약"은 "손상"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쨌든 이 계약이 임노동제 내에서 이미 그러했듯 "전도"되기까지 한다. 따라서 계약성은 마르크스의 담론 내에서 좌표점으로 기능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이러한 계약적-국민적 공간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전도'가, 하지만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유효범위를 지니는 '전도'가 행해진다. 우리는 계약적이라고 가정된 관계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크스 이론의 중심에 위치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 즉 임노동자의 착취당하는 신체와, 묘사/이야기/증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회색지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성과 아동의 과잉착취되고 예속된 신체 사이의 놀라운 간극을 관찰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성과 아동의 신체가 마르크스 이론의 완전한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이론적으로 정의된 어떠한 사회적 메커니즘들을 통해 이 신체들이 생산되는지 보여주려 애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여성과 아동의 신체는 이론의 메타/구조적 축에 따라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의 단어들인 자유-평등-합리성은 프롤레타리아의 향연에 자연스럽게 진입한다. 자유와 평등, 합리성이라는 단어들은, 자신의 의미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계급적인 근대적 구조에 대한 이론화 속으로 자연스럽게 진입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분석론은 동시에 해방에 대한 하나의 시각을 함의하고 있는 하나의 비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르크스에게서의] 젠더적 관계라는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면, 이 단어들이 지니는 자체적인 구성주의적 적절성은 상실되고 만다. 이 단어들은 노예제의 묘사적 어휘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근대사회를 선언하는 것으로서의 이 단어들의 철학이 동일한 방식으로 노예제와 관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 이전에 그 어떠한 이론가도 산업노동에서의 구체성과 가사노동에서의 구체성(여성의 노동이 산업노동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아동에 대한 수유와 돌봄, 요리 그리고 바느질과 수선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속에 사로잡힌 여성의 노동을 이론적 문제로 구성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는 단순히 마르크스의 이론이 여성 노동이라는 대상에 적용된다는 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대상은 노동-하는-신체에 관한 이론, 그리고 동시에 노동하는 성과 가족에 관한 이론으로서 그 자체 성별화된 하나의 이론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