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6월 23일
어제 모스크바 여행에서 갓돌아온 여배우 카린 미카엘리스가 브레히트를 방문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여행에 열광하였고, 브레히트는 s.트레차코브가 안내해주었던 그의 모스크바 여행을 회상하였다. "트레차코브는 그에게 모스크바의 이것저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했지요. 그가 한 행동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읍니다. 그는 그러한 것들이 자기 것임을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이 가진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낄 필요는 없지요." 라고 말하고 난 한참 뒤 브레히트는 "그런데 나중에 가서는 나는 좀 진력이 났지요. 나는 모든 것을 경탄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읍니다. 그가 말한 것은 그의 군인들이었고, 그의 짐차였을 뿐 나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6월 24일
브레히트 서재의 천정을 떠받치고 있는 대들보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진실은 구체적이다> 창가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당나귀가 서서는 그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브레히트는 그 푯말을 뒤집어서는 그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또한 역시 또한 이 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8월 5일
삼 주 전에 나는 브레히트에게 내가 쓴 카프카에 관한 논문을 주었다. 그 논문을 이미 읽었음 직한데도 그는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려 들지 않았다. 두 번이나 내가 그 논문에 대해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였다. 드디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원고를 다시 가져와 버렸다. 그런데 어제 저녁 그는 갑자기 이 논문에 대해 언급하였다. 좀 느닷없이 얘기가 전개된 것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었는데, 브레히트는 나의 스타일이 니체 식의 일기형식으로 쓰어졌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고 말하였다. 예컨대 나의 카프카 논문은 - 브레히트는 카프카를 단순히 현상적인 측면에서만 고찰하였다 - 카프카의 작품을 상관관계라는 측면과는 일체 유리된 채, 또 심지어는 작가와도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자라난 그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내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항상 본질Wesen에 관한 문제인데, 사물의 파악을 그런 식으로 해도 될 것인가? 오히려 카프카에 있어서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하고 그는 말하였다. 다시 말해 특수한 것보다는 일반적인 것이 무엇이냐를 검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브레히트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신문기자와 잘난 체하는 문인들로 둘러싸인 나쁜 환경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문학은 비록 유일한 현실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현실이었다. 카프카의 장점과 약점, 즉 그의 예술적 가치와 또 그의 개성은 문학적 현실을 가장 중요한 현실로 간주하는 이러한 태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카프카는 볼품없이 삐쩍 마른 유대소년이고 - 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우리는 아리안소년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또 프라하라는 영롱한 문화의 늪에서 생겨난 하나의 비누방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이러한 면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의 문학은 매우 흥미 있는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또 우리는 이러한 면을 전면에 부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흥미 있는 면을 노자와 카프카라는 제자와의 대화의 형식을 통해 한번 상상해 볼 수도 있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자네 카프카군! 자네는 자네가 살고 있는 조직들, 법적 경제적 형식들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지? -- 그렇습니다. -- 이제 자네는 이러한 조직들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 속수무책이지? -- 그렇습니다. -- 자네가 가진 휴식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끼지? -- 그렇습니다. -- 만약 그렇다면 자네는, 자네가 믿고 기댈 수 있는 한 사람의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네." 이러한 상황은 타기할 만한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브레히트는 카프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쓰임새의 고통>이라는 어떤 중국 철학자의 비유에 대해 언급하였다. <숲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있었다. 제일 굵은 나무로부터는 배를 만들기 위한 대들보감이 베어졌고, 좀 덜 굵은 그런 대로 쓸 만한 나무로부터는 상자 뚜껑이나 관이 만들어졌으며, 가장 가는 나무로부터는 회초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잘못 자란 구부러진 나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들 잡목은 쓰임새의 고통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카프카가 쓴 작품을 볼 때도 우리는 위의 숲에서처럼 사방을 둘러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같은 시각으로 보면 그의 작품에서 꽤 쓸만한 것을 다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이미지는 대단히 훌륭하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은 비밀의 잡동사니다. 그것은 정말 별볼일 없는 것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도외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깊이를 가지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 깊이는 그 자체만으로서는 하나의 차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깊이 속에서는 어떠한 것도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브레히트에게 내가 깊이에 들어가는 것은 정반대의 입장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방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예컨대 칼 크라우스에 관한 논문에서 나는 실제로 그러한 반대입장에 이르렀지만 카프카 논문에서는 칼 크라우스에 관한 논문에서처럼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노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의 카프카 논문이 니체의 일기식의 서술이 되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칼 크라우스와 카프카를 특징짓는 한계영역 속에서의 논쟁이라고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나는 카프카의 경우에는 한계영역을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실제로 상당한 양의 쓸모없는 찌꺼기들과 비밀의 잡동사니가 들어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분명하였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것은 다른 면이고, 내가 논문에서 다루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다른 면이었다. 브레히트가 이렇게 제기한 물음에 대해 결국은 작품 하나하나의 해설을 통하여 입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카프카의 <이웃마을>이라는 짧은 단편을 예로 들었다. 나의 이러한 제안에 브레히트는 약간의 당혹감과 갈등을 느끼는 듯했다. 이 얘기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H.아이슬러의 주장을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얘기의 가치를 그에게 주지시키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좀더 자세히 검토해 보아야겠지요.>라고 그는 말하였다. 이로써 대화는 끝이 났다. 이미 밤 10시가 되었고 이때 빈으로부터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8월 31일
삶의 진정한 척도는 기억이다. 기억만이 뒤를 되돌아보면서 마치 섬광처럼 삶을 한번 쭉 훑어볼 수가 있다.
1938년 7월 26일
어제 저녁 브레히트가 한 말 ----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한 사실 -- 이데올로기에 대한 싸움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는 점.>
8월 25일
좋은 옛날 것 위에 건설하지 말고 나쁜 새로운 것 위에 건설하라. - 브레히트의 좌우명
두사람의 대화에서는 물론 브레히트의 극작품들과 연극관이 주제가 되었다. 둘이 브레히트의 극작품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벤야민이 덴마크로 찾아오기 전부터였다. 벤야민이 브레히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극작가 브레히트의 "지극히 가볍고 확고한 터치"를 언급하거나, 브레히트의 극작품을 바둑에 비유하는 대목도 있다: "당신은 모든 인물과 공식을 적재적소에 배치합니다. 그렇게 배치된 인물과 공식은 제자리를 지키면서 적절한 전략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제 스코우스보스트란에서 두 사람은 저녁 내내 문학과 예술과 사회와 정치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에게 이 대화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벤야민의 기록(브레히트의 견해에 초점을 맞춘) 뿐이므로 벤야민 자신이 이 대화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상상해볼 도리밖에 없다. 이 대화에 자주 등장한 주제 중 하나는 동작Gestus이었다. 이 대화에서 브레히트가 동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언급한 것은 자기가 쓴 교육용 시 한 편이었다: "내가 카롤라 네어에게 가르친 것은 가지가지였습니다. 연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수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전에 그녀의 세수는 그냥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는 정도였습니다. 세수도 아니었지요. 그녀는 나한테 얼굴 닦는 법을 배우고 얼마 후 세수의 완벽한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저녁시간은 이처럼 유쾌하고 활기찼던 반면, 낮시간은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다. 작업량은 많았지만, 비중 있는 글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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