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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texte

호모 아카데미쿠스_피에르 부르디외_1장_동문선

by jemandniemand 2020. 8. 5.

 

 

 

대상으로 너무 지나치게 접근한다든지, 혹은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다든지 하는 것이 학문적 인식에 장애가 되는 일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 근접 관계가 설정되고 나면, 연구 대상뿐만 아니라 연구 주체에 대한 기나긴 작업을 치르면서 우리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알 수 있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왠지 알 수 없거나 알기를 원치 않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일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

-> 행간을 읽어나가면서, 다소간은 의식적으로 분석의 여백을 채워 나가면서, 혹은 아주 단순하게 '사람들이 말하듯이 자신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학문적 조사로부터 단호하게 검열된 규약의 의미나 가치를 변형시키는 것은 바로 독자 자신이다 - - 학문적 구축물에 대해 일상적 인식의 측면으로 몰아가는 것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결과를 갖고 있다. - 왜냐하면 독자는 학자저 언어와 일상의 언어에 공통되어 있는 단어의 의미를 일상 언어의 의미에 귀착시키기 때문. 

 

영역champ에 대한 구조적 필연성의 효과는, 개인들을 연결해주는 외연적 우연성을 통해서만이 성취된다. -> 우연성/ 호의나 혐오로 체험되는 아비투스

 

-> 지적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메커니즘의 증대된 지식은, 자크 브베레스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도덕적 책임의 불편한 덩어리로부터 개인을 내려놓게 하는 효과를 갖지 않았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사회학자는 자유의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게다가 사회학자는 자신이 하고 있는 학술적 정열론이 그 자신을 위한 사회 분석의 도구였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회 분석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어느 정도 바랄 수 있다. 

 

 

 

구축 작업과 그 효과

객관적이고 초월적 주체로부터 비난받을 수 없는 명백함으로 '싸움에 초연한' 자세를 다시 보이려는 야심. 

-> 관점을 끌어넣지 않는 대상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과학적이고 편파적이지 않게 하려는 객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관점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연구라는 것..

그룹의 범주를 정할때조차 ... 그러나 자신은 자신이 하는 것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고 한다.. -> 이는 자기 자신이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자신이 했던 것 안에서 발견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 

 

구축 작업의 단계: 1) 학자적인 구축은 서로 다른 지표의 완만하면서도 어려운 축적을 통해서 획득되어진다 -> 2) '권력자들'과 힘의 외형은 점점 더 집권자들과 힘이 갖고 있는 여러 다른 형태의 변별적 자질의 분석적 배열에 그 자리를 내준다. -> 3) 첫번째 직관과의 단절( 이러한 기나긴 변증법적 과정의 성과  ) ---> 새로운 가설이 떠오르게 할 수 있는 어려움이나 부족함 및 기대감 덕택에 그 가설을 초월하게 될 때 더 정통한 새로운 가설을 산출하면서 분석 조정되고 있다. 

 

23쪽. 그러니까, 학문적 연구의 산출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한가지는 이미 사회적으로 확인된 규준화를 취하는 경우이고 다른 한가지는 협상의 논쟁이 될 수 있는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판단 기준을 생산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제도화된, 공식 자료에서 알아낼 수 있는 특성들

후자는 객관화되지 못한 특성들. 

둘 간의 경계는 애매모호한 면이 있으며, (...)

 

-> 애매모호한 이유는? 상황이나 시대에 따라서 변화될 소지가 있기 때문! 상황이라 함은 해당 분야의 대상을 이끌어가는 힘의 계층화와 정의 원리들, 힘의 문제는 대상 그 안에 제기되어 있다는 것!

--> 그리하여 대상의 구축 작업은 유효 변수로서, 그것의 변이는 관찰된 현상의 변이에 연결되어 있는 가설에 의해 제도화된 관여적 특성들의 유한한 총체를 확정하고 있다. 

- 특징화된 모집단을 설정한다! 우선은 설명해 내야 할 전체 효과를 산출

모든 객관적이여 보이는 것들조차 조작이기 때문 - 이러한 조작! 모든 것들을 분류하는 방법에 대한 담론은 암암리에 배제되어 있음!

 

학자적 코드화의 효과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ㄱ. 존재하는 양태나 정도를 고려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모집단의 개체군 파악!) ex. 성별로서 구분하여 파악하기.. 가능한 모든 범주화를 만들어보기? - 어떤 조직 혹은 집단의 힘의 유지 장치(~협회/회원끼리의 친밀한 연대/조직을 옹호하는 대리인)

--- 우선 모든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학이란 곳의 영역(장)은 정통적 소속, 그리고 서열의 기준과 조건을 규정하기 위한, 다시 말해서 자본으로 기능하면서 각 영역에 의해 보장된 특수한 이익을 산출하기에 적절하고 효과적이며 관여적인 특성들을 규정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이다. 

다른 기준에 의해 정의된 여러 다른 개인들 전체는 이들이 정한 기준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파헤치는 사회학은 '유형론typologies'이란 이름으로 종종 분석을 시도한다. -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은 국부적이고 한정되어 있으며 cosmopolitan한 것(????)으로서 진정으로 구축되어진 것은 아니다... -> 유형론은 '전형적인' 개인들이나 단체들을 묘사하려는 현실주의적 의도의 산물이기 때문에 연령이나 정치적 권력과 학문에서의 관계만큼이나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기준을 혼용하면서 불합리 속에서 이질적인 대립 원리를 결합하고 있다. 

ex. 굴드너가 기구에 대한 태도(학부에의 적응)나 전문 능력에서의 투자, 내부 지향 혹은 외부 지향에 따라 구분하는 국부적인 것과 범세계적인 것이 있다. 

 

28-29쪽. 사회학에 '유형론'이란 이름으로 제의되는 경향 -> 미묘한 지표들을 지적해야만 해! -> 현실적 구분들을 고려해야만 함. 

-> 그러나 한계는 '보여주는 것' 이상의 기능을 못한다는 것

- 외피만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지?

"우리가 그 형태로부터 구름을 분류하고자 할 때 얻어질 것과 결과적으로 흡사하다"

 

사회과학이 설명해야 하는 세계는 대상이며,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모든 것을 진리에 요구하거나 그것을 통해서 실존에까지 요구하는, 경쟁적이면서도 때로는 적대적인 표상의 산물이다. 

--> 입장에 결부된 권력의 보존과 증대의 관점에서부터 의견표명이 정렬되고 조직된다. -- 이런 것들은 필연성과 특히 위치와 진로에 기재되어 있는 한계를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감춰짐. 

- 간단하게 말해서 매순간 상징적 경합의 강력한 시간이라 할 수 있는 논쟁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회적 세계, 아주 특별히 말해서 적대자들의 실천적 인식은 환원이라는 방침을 따르게 된다. !!

어떻게 행위자들이 단정적인 합법화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교묘히 피하게 만든다. 이것은 '기술technique'이다. 

 

이것은 다만 게임의 논리를 곤고하게 만들 뿐. 더욱 재생산하는 것일 뿐. - judges의 판단? 여기서 '심판자'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32쪽 '하지만 특히 기록된 카테고리와 그것을 형성하는 것의 특성 사이에서 최소한 주목해야 할 점은 '판정자들'의 기준, 다시 말해서 그들이 판단하는 원리에 있는 검토 단계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공간에서의 위치에 대한 기준을 미리 예측하면서 얻어진 판단의 특성들을 미리 판단하는 것을 보게 한다는 점이다' - But, above all, the slightest attention to the relations between the categoremes selected and the properties of those who formulate them shows that we anticipate the nature of the judgements obtained if we anticipate  the criteria of selection of the 'judges', that is to say the spatial position, still unknown at the moment of research, which motivates their judgements. 

 

그렇다면.. 사회학자들은 이 기술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나? 그것은 불가피한가? '환원주의라는 덫!'

이론적이고 기술적 방법론에서 쓰는 힘이다 그것이 바로!

칼을 쥔 자를 치기 위해서는 내가 칼을 쥐어야 한다는 형용모순!

 

Epistemological vigilance인식론적 감시! 가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것!

그들이 주장하는 '이유'를 실질적 근거로 보지 않고, 과학 구축의 과정을 소상히 기술하는 것

그들의 이해관계/이익interest를 들여다보는 것

 

과학의 산물로서 사회의 이득을 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과학'을 위해 필요한 조건일 듯하다. = 과학적 이익이 사회적 이익을 포기하는 경우에만 진척시킬 수 있는 것이며, (...) (33쪽)

 

- 사회적 이익을 생산하기 위한 작업들 - 니체주의 계보학,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한 마르크스 비평, 지식의 사회학..

이것을 과학으로 이용하려는 유혹 -->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읽고 즐거워하는 꼴이 됨!! 특정 입장 혹은 태도의 발생 근거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묘사는 태도의 이해당사자들의 이익interests과 관련한 원칙 이외에 어떠한 원칙도 생산해내지 못한다!

- 그런데 과학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역은 '미국적'인 데 있기 때문에 경험적 검증과 과학은 상충하기 마련!

과학과 실제 사이의 괴리 발생: 과학이 발생하는 과정은 (실효성을 지닌 힘 -> 완전한 총체의 구축 -> 객관적 공간의 산출)

--> 이것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전술했듯 과학적 방법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따라서 경합 투쟁의 원리를 찾아내어 권력의 서열을 정의하고 보존하고 변형하는 그러한 투쟁의 논리를 묘사하는 과정은 '환원주의적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

 

이것을 연구자는 모두 '통합시켜야' 한다!! 양식있는 배열의 산출을 통해!

-> 원근법주의적인 견해를 추월할 필요성이 있다 -> 성좌를 만들어라는 것!constellation

 

대학이라는 영역은 '분류의 투쟁 장소'이다. (여느 영역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러한 분류의 기준과 변화의 과정을 파헤치는 작업을 하기 위한 행위자들의 위치는 모두 다르고 할 수 있는 것의 역량도 모두가 다르다.

이러한 장소 내에서(region/지역) 행위자들은 분류 책략을 통해서 객관적 토대를 보존하거나 변형시킬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런 책략을 모두 합해서 그들 구성원들의 이익 옹호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집결된 집단 구성을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의 강요는 어떻게 처리하나?

모든 실천적 이해는 '환원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 실천적 이해의 모호함. 

객관적인 세계의 논리를 이해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이런 객관적 이해를 실천적 이해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은.. 모호함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금하게 만든다.!

--> '자아분해!' 

 

우리가 뚫어야 할 벽

'집단적 방위 체계' - 진실을 은폐시킴

학문적 예의 관행. 학문적 신분 지표의 필수 불가결한 구축

 

- 위치 상동 조건의 동일성: 3P

- 가능한 모든 피지배자들의 연대성과 그들의 친숙한 책략. 

---> 정치화는 언제 어떻게 일어났지? 를 또 조사할 필요도 있을 것이야!

 

경험적 개인과 에피스테메적 개인(인식론적 개인)

 

우리가 고유명사의 사용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독자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효과는, 과학적 인식의 논리에 통상적 인식 논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는 어떠한 대상에 대해 자의적으로 붙여질 수 있으며, 무엇 때문에 고유명사가 다른지를 규정하지 않고 그냥 다르다는 사실만을 지칭해 줄 뿐이다. 인지의 수단인 고유명사는 경험적 개인을 찾아낸다. 경험적 개인은 단순한 것으로, 다시 말해서 다른 것처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만 차이의 분석을 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구축된 개인은 명시적으로 정의된 특성들의 유한한 총체에 의해 정의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구축된 개인은 통상적 공간 속에서 지시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유효한 변수의 한정된 전체 정의에 의해 산출된 차이로부터 구축된 공간 속에서 지시 대상을 찾아낸다.

 

에피스테메적 레비스트로스는 검토되고 있는 이론적 세계에서 관여적인 특성들의 유한한 총체와 다른 구축된 개인들에 결부된 특성들의 유한한 총체 전체간에 설정된 양자 사이에 불균등하게 연결되어 있고, 불균등한 강도의 차이 체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끝이 없는 독사적인doxique 레비스트로스와 달리, 에피스테메적 레비 스트로스는 개념화를 벗어나는 어떤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구축은 관점이나 선별적 시선 원리와 같은 이론의 발전과 환원의 보완물이며, 일시적으로 배제된 특성들(예컨대 정신분석학자가 구축하게 되는 것들)의 이론에 통합하기 적절한 조작과 카테고리의 개입에서 생겨날 것이다. 

좀더 쉬운예로 지도를 들자

그것은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이화의 공간 논리, 다시 말해서 차이화의 원리 전체에 대한 논리적 유효성을 재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 그러니까 지도의 기호는 인식론적 기호라는 것!

 

내가 지도라는 예를 든 것도 같은 원리! 지도의 소박한 해석은, 그것이 구축하고 있는 바 그 자체의 학문적 효력을 만들어 간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명시적으로 정의된 변수의 유한한 총체로부터 구축된 차이의 이론적 공간 속에서, 소박한 독서는 통상적 경험에서 확인된 경험적 차이 전체를 재발견할 수 있다. -->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차이를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

 

A는 B의 모델! 은유적 접근? (44쪽)

이런 명백한 느낌은 잘 만들어진 지표나 도표와 같이, 우리가 통상적 생활에서 실천하는 바와 같이 지도가 '현실'의 모델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해될 수 있다.  --> 독자의 오류가 발생하는 시점!

 

 

이런 점에서 지도는 세계에 내재된 필연성에 더 잘 적합한 행위자들의 실천을 방향잡게 하는 지각과 행동의 실천 도식을 객관화되고 코드화된 형태로 기능하게 할 수 있다. 

 

 

이는 행위자들의 전략의 근본원리이며.. 그런 것들을 통해 개별 요소를 정의하는 관계 구조와 요소의 생성 변화에 대한 근본 원리이다. --> 이와 같은 분석에서 우리는 사회적 세계에 대한 모든 과학적 담화의 어려움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며, 그 세계는 해당자가 확신하고 명확한 태도를 취하는 방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담화의 경우 최고조에 달하게 될 것이다. 

ex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사람에게,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 마르크스주의>가 그의 태도를 취하는 방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다!

--> 그 사람이 만일 '자기계발서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난다면? 인신공격적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 농후..

 

독자와 집필가의 관계

집필자는 문체의 가장 미세한 차이 - 그러나/아마도/ 등등 - 에서 선입견이 될 수 있는 지표를 독자가 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학의 논쟁은 은유나 암시, 단지 암호를 소유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이런 경우 이외에도 공격 목표가 되는 논쟁의 적들만의 이해된 암호 표시를 지칭한다. 

cf. 우언법: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그 사물의 속성이나 특징 따위를 빌려 넌지시 표현하는 수사법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또다시 집필자가 만들어 놓은 (또다른) 성에 독자를 가두는 격이 된다?

And the concepts constructed to designate the regions of the theoretical space of pertinent positions, in this particular case, the classes of individuals defined by the tenure of the same region of constructed space, have every likelihood of suffering the same fate, either by being overshadowed, in the reading, by the institutions which they partially overalap, or by functioning as simple labels, similar to the impressionistic notions which are current in everyday life, especially in polemics, and which are taken up more or less unthinkingly by the authors of 'typologies'.그리고 관련 위치의 이론적 공간의 지역을 지정하기 위해 구성된 개념들, 특히 이 경우에, 건설된 공간의 동일한 영역의 종신 재직에 의해 정의된 개인 계층들은 그들이 소속된 기관들에 의해 무색하게 되거나, 읽기에서 같은 운명을 겪을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즉즉즉즉 이 모든 것을 왜 이토록 길게 얘기하게 되었는가? 

= 진정한 인식론적 신분을 부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또 거의 불가능하다! 나의 논리가 기대고 있는 도식은 언제나 선행하는 과학을 토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공간의 동일한 지역 안에 집결된 행위자들 전체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족적 유사성'이라고 부른 것에 따라서 통합(은) 될 수 있다. 동족 안에서 끼리끼리 이루어지는 논쟁..이라는 말? 

-> 이론의, 이론을 위한, 이론에 의한 ....이론.

 

상징적 투쟁은 정통적 명명의 독점권을 쟁점으로 내걸고, 지배적인 관점은 정통적 관점으로 승인해 주면서, 개별적 관점의 진실 속에 위축되고 날짜를 써놓게 된 것을 무시하도록 한다.  = 그러니까 경험적 개인과 인식론적 개인의 간극/괴리가 발생한다는 것. 앞선 색깔글자에서 붉은 색 글자가 누락되는것

----> 나는 '상징적 자본'에 의해 지배된 세계에서 신용credit을 축적하거나 다른 사람의 신용을 상처내려는 모든 책략을 아주 논리적으로 유지시키려는 입장만을 환기시킬 것이다. 

지칭이 다른 사람,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 외의 집단의 객관화를 조작하려 할 때, 모독이나 논쟁적 공격에 대해 독자가 이득되게 지칭을 첨가하고 왜곡시키려는 가능성이 생긴다..(혹은 그럴수밖에 없다?)

 

-- 중간 정리 --

경험적 개인 --> (표시/고유명사=코드화) --> 인식론적 개인 = 차이의 재발견!

but.. 인식론적 개인 -x-> 인식론적 개인  (왜냐면, 개별적 진실을 위축시키기 때문. 화소수가 떨어지기 때문)

그렇다면 해결책은?

그것은 외부 관찰자의 관점 체계를 단번에 환기시킬 수 있는 '개관적인' 개념 혹은 다의 명칭을 결합하는 것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다.

(=게임의 풍경을 보여주기보다 게임의 규칙을 보여주는 것!) --> 사회학의 임무! 과학성의 수사학이 아닌 '과학적 수사학'을 강조!

Scientific discourse is distinct from the discourse of fiction in that, as John Searle remarks, it means what it says, it takes seriously what it says and accepts responsibility for it(for the mistakes) 

To inspire belief in the truth of what is said, (...) 이 강박증이 넘 심해서 과학적 수사학은 과학이라는 허구를 생산해내기까지 한다. 책임을 져야 하므로.. 증강현실을 만들 지경이 된다는 것이지.. ---> 사회적으로 승인된 과학성!(Hard science? maybe)? 

-STS의 논의와 매우 유사한 것 같아..

 

과학성의 '실증적 독점권' -- 여기서 권력이 발생함!!!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동맹자들'이 자꾸만 붙기 때문!

 

우리가 과학적이라 부르는 담화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인식하는 규범에 적어도 명백한 합치성에 토대를 둔 과학성의 인상을 산출하는 담화일 수 있다. =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과학적이기 때문이다? (fun, cool, sexy!)

사회학/역사학 = 문학적 우아함 + 과학적 표식(곡선 그래프나 통계표, 수학적 공식의 구사 등) --> 일종의 학문적 욕망?

일종의 위선주의적 허세가 아닐까? (wow.) 표준적 학문의 형식주의적 요구(어의 검사, 오차 계산, 참고 문헌 지시, 도표 등)에 과시하려는 듯한 순응과, 필연적이지만 불충분한 최소 지시 항목의 외면적 존경은 학문적 경외심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학문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조작을 반성없이 수행할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의문들을 왜곡시키기에 충분하다. self-fulfilling prophecy

 

사회학의 시선은 땅바닥도 아닌 허공도 아닌 중간 언저리.. 저공비행의 상태에서 바라보는 시선?

활동하는 데서 얻어진 행위자들의 부분적이며 공평한 관점도 아니고, 신과 같은 관찰자의 절대적 관점도 아닌 위치로부터 포착된 학문적 시각은, 인식 도구의 주어진 상태에서 성취될 수 있는 가장 체계적인 전체화를 나타내주고 있다. 

따라서.. 결국... 특수한 관점을 보편화하거나 사회적 공간 속에 있는 위치에 결부되어 어느 정도는 무의식의 이성화된 형태를 누설하고 싶지 않다면, 연속적으로 모든 상자를 열 필요가 있을 것이다. That is, he must evoke the structure of the field of power and the relation which the university field taken as a whole maintains with it, analyze the structure of the university field and the position which the different faculties occupy within it, and, finally, analyze the structure of each faculty and the position that the different disciplines occupy within it

 

== 우리가 자기기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작업은..? (우리 자신의 지위) < (그러한 지위가 속해 있는 학문의 지위) < (학문의 생태구조) < 권력구조! = 그리고 그러한 구조의 역사적 흐름/변화를 볼 필요도 있을 것.. 

사회학의 위상은 원래부터 이랬나?

사회학의 쓰임? 무쓸모의 쓰임?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로 귀결될 수 있는 질문이지만)

 

 

1968년 프랑스 학계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YCtcD9CfMOI

 

교원수의 증가에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학생 수의 증가는 관계의 전복/균열을 불러일으켰다. 

기존의 것을 재생산시키려는 움직임도 -> 외부로부터 최대한 효용가치가 있는 자원을 끌여들일 수 있도록 공간을 개방하게 되는데 이에 뒤따라오는 것은 '역사'의 민낯/역사의 현장!

문장법에서의 시제 - 과거도 지금도 아닌 전시간적 현재! = 사회학은 이렇게 현재에 대해 바로 눈앞에 존재하지만, 그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기 쉬운 학문, 앵글로색슨족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학문이며, 앞으로 전진해가면 갈수록 물의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학문임에 틀림없다 - 역사적 사건의 비역사적 모델.. 

 

여기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권력의 출현'

하위직의 수적 증가, 제도적 변화의 모순은 도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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