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비자이 프라샤드
제국의 포석 아래
이나라
우리는 우리가 지금 찍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크리스 마커의 카메라 실천
김은희
사막을 걷는 가렐
크리스토퍼 코너리
해방의 변증법: 글로벌 1960년대와 현재
로이스 응
스탠리 위로 비친 붉은 태양, 센트럴 위로 비친 붉은 별
이고르 세브축
「초기작들」: 1968년 궤도의 유고슬라비아 영화에 접근하다
남승석
유고슬라비아 블랙 웨이브와 프락시스 그룹: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향한 예술과 철학의 인본주의적 접근
유운성
전용의 계보: 당수태권도는 변증법의 정도(正道)일 수 있는가?
아다치 마사오
고다르가 결코 쓰지 못한 증언
서현석
장 루슈가 남쪽으로 간 까닭은?
곽영빈
베르톨루치, 또는 허구를 구하기
존 조스트
1968, 시카고
"과거에 예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의 예술은 혁명을 잠재우려고 존재해. 물론 아직도 혁명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야."
"그래! 사회 참여! 예술가들이 참여의 방향을 바꾸고 있는 듯하다. 애초부터 있던 것들을 비로소 제대로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존 질서나 인간 영혼의 썩은 취향을 비난하는 건 소용없다는 사실. 외부로부터 변화나 개선을 끌어낼 수는 없다는 사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 한 자아의 내면적 아름다움이 타인에게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세상을 바꿈'으로써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 하지만 하나의 변화는 이전의 어떤 변화만큼이나 나쁠 수 있다는 사실. (인간은 태초부터 늘 세상을 바꿔 오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진정한 변화는 오직 나의 내면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 내 안에서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 ... 인간은 늘 그 사실을 알았으나 망각하고 또다시 깨달아 왔으며, 우리 역시 이를 다시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 (p.64)
여성들은 남성 혁명가들의 여성 관련 연설과 행동 사이의 불일치에 점차 분노했다. 남성들은 혁명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ㅑ 하고 ('그들의' 여자를 포함해) 여성을 다르게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여성들은 혁명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여성을 위한 혁명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혁명은 '나'는 언제나 '나'이며 나를 위해 웃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다르게 혁명을 해야 한다. 내가 직접 하겠어."
여성들에게 68년 5월의 중요성은 양날의 칼이었다. 68년 5월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바와 욕망하는 바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촉매제였다. 여성들은 변화의 가능성을 잠시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변화는 남성이 군림하는 혁명으로부터 올 수 없으며, 혁명을 스스로 통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1970년 뱅센 대학의 한 여학생 집회에서 남학생들이 "권력은 남근의 끝에 있다"는 슬로건과 함께 훼방을 놓았을 때 이러한 자각은 강화되었다. (p.77)
"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사교의 예술 형식인가요! 의미를 공유한다고 믿다니! 작동하는 공동체가 있다니!
[무대 위 배우]는 세상을 향해 말합니까, 아니면 세상을 위해서만 말합니까? 세상을 향한다는 건 뭔가요? 그에게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는 어느 지점에서 현실과 연결됩니까? 인터랙티브 - 그러니까 '상호 능동적'(inter-active) - 연극은 지난 수십 년간 테러 자체였습니다. 혐오스러운 사교 예술 형식이지요. 그러나 엉망이 된 소통 상황을 연극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극 관객도 언제나 끔찍한 공동체를 형성해 버리니까요.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의미를 공유한다고 믿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의미 공동체로 인식할 뿐더러, 존재하지도 않는 의미를 끊임없이 서로 말하는 걸 소통이라고 여깁니다. 인본주의는 의미를 다시 찾으라고 강제 혹은 권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의미가 있는 곳에 도달만 하면 그것이 의미임을 바로 알 수 있다는 듯이요. 하지만 어쩌면 의미라는 건 우리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여기 이것 말고는요. (몸을 긁는다.) 그래서 대신 사람들은 공통 이해를 분모로 하는 공동체를 연극에서 찾았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고대에는 신과의 관계에 대해, 근대에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현대에는 인간관계에 대해 공통 이해를 모색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인간관계는 항상 의미의 부재를 수반하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른 방식으로 '함께'하는 것에 대해 공통 이해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비공동체적 공동체'에 대해서요. (...)
[무대 위 배우]는 일단 우리 모두를 위해 말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발 피와 땀과 눈물, 그런 구닥다리로는 말고요. (손, 겨드랑이, 눈에 스프레이를 뿌린다)
1971년과 반대로, 아직 여기 어딘가에 보존된 가치가 있긴 합니다. 브레턴우즈 협정, 즉 국제 통화의 기준을 금으로 정했던 브레턴 숲에서의 협정을 1971년 한순간에 끝내 버린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없앨 수는 없는 가치이지요. 사회적 가치 금고는 아직 존재합니다. 1971년 이후 금융 경제에서는 폐기했지만요. 우리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은 1971년 이후에 폐기되었습니다. 그것에 관해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1971년 이후로 분명해진 사실입니다. (...)
도대체 이게 다 뭡니까? 정치와 종교가 후퇴했다는 말은, 그게 당신의 삶에서도 후퇴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아직 있는 것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런데 도대체 정치는 어디로 후퇴한 걸까요? 중간 없이 과거와 미래를 바로 접붙이려는 퇴행적인 자기기만이 아닌, 온전히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정치 경험은 다 어디로 갔죠? 시위자들이나 자동차 방화를 하는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처럼요. 이제는 그 실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함께 정치도, 이런 '공간을 공유하는 함께함'도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저항이 현재를 쫓아오지 못합니다! 성급히 미래에 도킹하려던 과거의 저항 형태 사이에서 (폭죽에 불붙인다) 현실 정치 경험은 누락됩니다. 그런 경험은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일까요? 하기야 뭘로 만들겠습니까? 경험이라는 영혼이 담길 수 있는 육체가 없는데요.
그러나 육체야말로 진행 중인 저항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걸 생각하는 방식은 1971년으로 폐기되었습니다. 그것에 관해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1971년 이후로 분명해진 사실입니다.
아도르노는 말했죠. 석기 시대부터 그랬다고. 난 말합니다. 1971년부터라고! (p.447-449)
'01 tex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본론I (하)_칼 마르크스_김수행_비봉_2015 (0) | 2020.02.14 |
---|---|
코뮤니스트 후기_보리스그로이스_김수환_문학과지성사_2017 (0) | 2020.02.14 |
감정화하는 사회_오쓰카 에이지_선정우_리시올_2020 (0) | 2020.02.10 |
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_피터 브룩스_박인성_문학과지성사_2017 (0) | 2020.02.09 |
자본론 I (상)_칼 마르크스_김수행_비봉_2015 (0) | 2020.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