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 파괴적 성격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그가 살아오면서 참고 견뎠던 거의 모든 구속들이, 누구나 그들의 파괴적 성격에 대해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하고 있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날 그는 그것도 아마 우연한 기회에 이러한 사실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가 받게 되는 쇼크가 가혹하면 할수록 파괴적 성격이 무엇인가를 묘사할 수 있는 그의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구호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행동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없애는 일이다. 맑은 공기와 자유로운 공간에 대한 그의 욕구는 어떠한 증오보다도 강하다.
파괴적 성격은 젊고 쾌활하다. 왜냐하면 파괴한다는 것은 우리들 본래의 나이의 흔적을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괴한다는 것은 사람을 쾌활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은 파괴하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의 완전한 환원, 아니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의 말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아폴로적인 파괴자의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만약 세상이 어느 정도 파괴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점에서 검토되어진다면 세상은 엄청나게 단순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현존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괄해서 하나로 묶는 커다란 끈이다. 이러한 인식은 또한 파괴적 성격에 깊은 조화의 스펙터클을 제공해주는 하나의 시야이다.
파괴적 성격은 일을 할 때에 언제나 싱싱하다. 파괴적 성격의 템포를 결정하는 것은 -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 자연 그 자체인데, 왜냐하면 파괴적 성격은 자연에 앞서서 선수를 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스스로가 파괴하는 일을 떠맡게 될 것이다.
파괴적 성격은 어떠한 비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파괴적 성격은 파괴된 것 자리에 무엇이 대신 들어설 것인가에 대해서는 추호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순간 동안 그가 원하는 것은, 빈공간 다시 말해 사물이 서 있었고 또 희생자들이 살았던 장소이다. 그러한 빈공간을 채우지 않고서도 그러한 빈 공간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는 틀림없이 있게 될 것이다.
파괴적 성격은 그의 일을 행하지만, 창조적 일만은 기피한다. 마치 창조주가 고독을 찾듯이 파괴하는 자는 끊임없이 그의 활동의 증인이 될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지 않으면 안된다.
파괴적 성격은 하나의 신호이다. 마치 삼각형의 깃발이 바람의 방향에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듯 파괴적 성격은 사방의 소문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이러한 소문으로부터 그를 보호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파괴적 성격은 남으로부터 이해를 받는 일에는 일말의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방향에서 노력하는 것을 그는 천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그에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는 마치 고대국가의 파괴적 제도인 신탁이 그러한 것처럼 그러한 오해를 도전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모든 현상 중에서 가장 소시민적인 현상인 험담과 뒷공론은 사람들이 오해를 받지 않고 싶어하기 때문에 생겨날 따름이다. 파괴적 성격은 오해되어지는 것을 허용한다. 파괴적 성격은 험담이나 뒷공론을 조장하지 않는다.
파괴적 성격은 지식인의 적이다. 지식인들은 안일을 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안일의 핵심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의 내부는 그가 이 세상 위에 찍어낸 우단으로 만든 흔적이다. 파괴적 성격은 심지어 파괴의 흔적까지도 지워 없앤다.
파괴적 성격은 전통주의자의 전위대열에 서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물을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고 또 보존함으로써 사물을 전수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사물을 쓸모있게 만들고 또 없애버림으로써 상황을 전수한다. 파괴적 성격은 후자를 두고 일컫는 것이다.
파괴적 성격은 역사적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세상사의 진행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불신과 세상사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이다. 파괴적 성격이 가장 신빙성을 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파괴적 성격은 지속적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어느 곳에서나 길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벽이나 산과 마주치는 곳에서 그는 하나의 길을 본다. 그러나 이처럼 그가 어디에서나 하나의 길을 보기 때문에 그는 길로부터 비켜나지 않으면 안된다. 이때 그는 언제나 조야한 폭력을 가지고 길로부터 비켜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매우 세련된 폭력으로 길로부터 비켜난다.
또 그는 어디에서나 길을 보기 때문에 그 자신은 언제나 교차로에 서 있다. 어떤 순간에도 그는 다음의 순간이 무엇을 가져다 줄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현존하는 것을 그는 파편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파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파편을 통해 이어지는 길을 위해서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1933 경험과 빈곤
경험은 유통 가치가 떨어졌고, (...) 전달 가능한 경험을 풍부하게 갖고 온 것이 아니라 그럴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돌아온 그들. 그 가운데에 파괴적인 흐름들과 폭발들의 역장 속에 왜소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몸뚱이가 있다.
이처럼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 위에 전혀 새로운 빈곤이 덮쳤다. 그리고 점성술과 요가의 지혜,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손금 보는 점술, 채식주의와 그노시스, 스콜라 철학과 심령주의를 가지고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 아니 오히려 사람들 위로 덮친, 답답하게 널린 갖가지 이념들이 이러한 빈곤의 이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경험의 빈곤은 거대한 빈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 그 거대한 빈곤은 다시 중세 걸인의 얼굴과 같은 날카롭고 정확한 윤곽을 띤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양의 산물 전체는 바로 그 경험이 우리를 그것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경험의 빈곤은 사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인류의 경험 전체가 빈곤해졌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로써 일종의 새로운 야만성을 뜻한다.
경험의 빈곤은 그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로 이끈다. 새롭게 시작하기, 적은 것으로 견디어내기, 적은 것으로부터 구성하고 이때 좌도 우도 보지 않기이다. 게다가 이미 이 형상들도 어떤 전혀 새로운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것도 그 언어에서 결정적인 점은 유기적인 것과 반대되는 자의적, 구성적인 것을 지향하는 특성이다.
경험의 빈곤. 이것을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동경한다는 것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사람들은 경험들에서 풀려나고 싶어하며, 그들이 그들의 빈곤을, 외적 빈곤과 결국 내적 빈곤까지도, 순수하고 분명하게 통용시킬 수 있는 환경, 그리하여 뭔가 훌륭한 것이 여기서 나오게 될 그런 환경을 동경한다.
피로 뒤에는 잠이 온다. 그리고 꿈이 낮 동안의 슬픔과 무력감을 보상해주고 깨어 있을 때는 힘이 없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참으로 위대한 삶을 실현시켜 보여주는 것은 전혀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니다. 미키 마우스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러한 꿈이다. 이 삶은 기술적 기적들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그 기적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 즉 그 기적들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그것들이 모두 기계장치 없이, 즉흥적으로, 미키 마우스와 그의 신봉자들 및 그의 추격자들의 몸에서, 나무나 구름이나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일상적인 가구들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또한 끝없는 일상의 분규에 지쳐버렸고 삶의 목적이 수단들에 대한 무한한 원근법적 시각에서의 가장 먼 소실점으로만 떠오르는 사람들의 눈앞에는 어느 방향에서나 가장 단순하면서 동시에 가장 안락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충족시키는 삶이 구원의 빛처럼 나타난다.
우리는 빈곤해졌다. 경제위기가 문앞까지 왔고, 그 뒤에 그림자가, 다가올 전쟁이 있다. 움켜쥐는 것은 오늘날 소수의 권력자들의 사안이 되었고, 이들은 아마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 인간적이지 않을 것이다.
2007 파상력
파상력은 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상상력과는 반대로,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이다 (=각성 체험)
실제적인 영상들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파괴하는 우상 파괴적 권능을 내포
첫째, 대상의 유기적 총체성(의 가상)을 파괴하고, 둘째 이처럼 파괴되어 파편으로 분해되어 흩어진 '폐허'에서 단편을 수집하여, 셋째 이처럼 수집된 단편들을 구축하여 새로운 성좌Konstellation 혹은 배열(Konfiguration)을 구축하는 절차로 구조화되어 있다.
우리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보다 지식사회학적 시각을 취한다면 벤야민적 사유의 저류를 구성하는 파상력이, 근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차원을 공통적으로 관류하던 일종의 파괴적 역동성을 그 모태로 하고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 2016 파상의 시대
파상의 시대는 문명사적 변동기이며, 대안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의 꿈들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문제화되는 시기다.
상상력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구성해내고,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간파하는 도식화의 능력이다. 그러나 파상력은 구성이 아니라 파괴의 방향으로, 질서가 아니라 카오스의 방향으로 활동한다. 상상력의 최고치가 꿈이라면, 파상력은 깨어남, 즉 각성의 순간에 발휘된다. 꿈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몽상세계의 난잡한 이미지들이 깨지고 흩어져 폐허로 부서져내리며 다른 세계(현실)가 열리는 충격을 경험한다. 이 충격은 새로운 인식가능성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꿈에서 깨어나는 체험에 원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파상력은 능동적 '행위력'이라기보다는 수동적 '감수력'에 더 가깝다. 깨어남은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여 도래하는 사건적 성격을 갖는다.
각성 이후의 체험을 중시했던 벤야민과 달리 나는 각성 직전의 체험을 더 중시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종종 체험하는 '가위눌림'이다. 몸과 정서를 덮쳐오는 부자유와 공포의 느낌을 떨쳐내고자 달아나거나, 머리를 흔들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발버둥을 치면서, 꿈의 마력을 떨쳐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깨어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깨어남의 과정이기도 하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의 시간, 이대로 꿈의 암흑 속으로 떨어져내려갈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파상력은 이때 솟구치는, 미약하지만 필사적인 힘의 총체, 이 마비적 몽환의 장을 벗어나겠다는 몸부림이다.
파상력은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한다. 예언하지도, 계몽하지도, 도덕적 훈계를 가하지도 못한다. 파상력은 상상력의 한계지점에서 나타나는, 능력과 무능력의 미분화된 체험 형식이다.
파상은 비판이 아니다. 꿈은 비판될 수 없다. 꿈이란 살과 삶의 절박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말이나 논리로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자신의 기능이 소진되었을 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상력은 실천론적이고 단자론적monadologique이다.
=> 순간의 명료함/명랑함. 현재에의 긍정. 오로지 현재만을 욕망하는 행위들...!
2011 망각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나타난 푸네스의 망각불능증. 푸네스는 인류 전체의 기억보다 더 많은 기억을 품고 있는, 걸어다니는 '바벨의 도서관'이었지만 정작 '사유'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사유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시키고 개념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로부터 채취된 방대한 사실들의 디테일을 무화시킬 때 비로소 사유가 시작된다. 사유는 긍정의 힘이 아니라 부정의 힘이며, 그리는 힘이 아니라 지우는 힘이며,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부여라기보다는 차라리 죽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유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잊음이다. 잊어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망각이란 무엇인가?
망각은 하나의 사건이다. 망각현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사건성이다. 때로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그 불가능성 앞에서 무기력하게 좌절한다. 따라서 진정한 망각은 망각 그 자체를 망각할 때 가능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주체의 의도 혹은 의지를 초월한 수준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망각은 일종의 반행위이다. 행위의 문법 자체를 교란시키는 행위 너머의 행위이다. 본질적으로 우발적이기 때문이다. 사건처럼 그냥 오기 때문이다. 망각의 주체는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에게 발생하는 우연을 그저 앓는 인간이다.
또다른 망각의 특징은 그 시간성 속에 있다. 망각은 음화적이다. 지금 잊는 자는 없다. '잊다'라는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는 자는 농담을 하는 것이다. 단지 '잊었음'을 깨닫는 시간이 지금일 뿐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기원Ursprung이 아마도 이런 시간을 지칭할 것이다. 기원은 저 먼 과거에 존재하는 시원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지금, 문제가 되는 위중한 상황에 지금의 내부로부터 솟아나와 지나간 미지의 순간과 성좌적 관계를 형성하는, 움직이는 검은 구멍이다. 이 시간의 흐름은 직선이 아니다. 그렇다고 원형적 회귀도 아니다. 서로 조응하는 두 개 시간의 힘이 충돌하여 빚어내는 폭발의 무늬, 그것이 망각의 시간이다. 망각의 인간은 시간적으로 분열된 존재, 자신 없는 존재, 시간의 주인이 아닌 시간의 한 현상으로 재조정된다. 망각의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로 구성된 그 자신의 타자이다.
이름을 망각한 사람은 망각된 이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는 거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없는 그것이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 쪽으로 맹렬하게 잡아당긴다. (...) 망각은 우리를 미래로 떠미는 알 수 없는 손길이다.
2017 부정자본론
부르디외의 상징자본 개념 탐구. 상징자본은 사회적 인정을 획득함으로써 어떤 자본이 취하는 형식form으로서, (...) 부르디외가 원용한 뒤르케임의 토템분석과 프로이트의 부인Verneinung 개념을 검토. 부르디외의 취향분석과 예술장/문학장 분석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부정적인 것'의 관점에 주목한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취향은 선호가 아니라 도리어 혐오의 능력, 즉 무언가를 부정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또한 예술자본은 사회적으로 부정적 가치들(가난, 고통, 질병, 광기, 죽음)이 예술적 성취와 함께 축성되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사회적인 것의 작용은 이중성을 갖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기존 질서를 재생산한다. 즉 인정된 것이 다시 인정되거나, 부정된 것이 다시 부정될 때 기왕의 질선느 재생산된다. 그러나 기왕에 부정되던 것이 인정되거나, 기왕에 인정되어 온것이 부정되는 경우에 질서는 변화한다.
사회의 창조성은 기왕의 지배적인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부정성의 작용이다. 이것은 단순한 해석의 참신함,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가치전도의 우발적 시도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기왕에 작동되는 코드의 가치위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순식간에 전도시킬 수는 없다. 부정적인 것이 작용하여 그것이 사회적 현실이 되는 과정에는 실천과 운동의 오랜 역사가 요구된다.
==> 슬픔과 진정성의 등치 현상은 어떻게 볼 것인가? 진정성 개념이 특정한 감정상태로 손쉽게 물신화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부정자본을 가지고 인정투쟁에 참여하게 될 때의 새로운 권력 헤게모니의 부작용은 어떻게 볼 것인가?
2019 인류세와 페이션시
인류세 담론을 들뢰즈와 가타리적 의미의 문제-어셈블리지로 이해하기를 제안. 파국에 내포한 변형적 생성의 가능성을 감수능력, 혹은 페이션시 개념을 중심으로 진단한다. 다섯째, 재귀적/성찰적 파국주의 개념을 제시하고, 파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
'변형적 생성'의 장소. 지배적 서사에 의해 구축되었던 질서가 흔들리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기억 혹은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이다.
파국주의는 단순한 비간주의나 허무주의가 아니라, 현실에 스며들어온 생태-존재론적 위급성에 대한 급진적 사유와 촉발된 감성의 결합물이다. 당면한 파국이 왜 인간 행위에 의해 생성된 것인지를 드러내며, 파국이 어떻게 집합적 각성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파국주의는 이처럼 이해된 파국적 상황에 대한 생태적 비전, 사회/정치/미학적 실천방식, 그리고 주체화의 앙상블이다.
'재귀적 파국' '성찰적 파국'. 재귀성은 사회변동의 거시국면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자기-대면" 운동을 가리킨다. 파국은 신이나 섭리, 혹은 역사 이성과 같은 초월적 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에 내재적인 원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재귀적 파국은 자기-회귀적이고 자기-발생적이다.
반면에 파국의 성찰성은, 파국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통찰이 심화되어가는 현상과 연관된다. 사실, 성찰성은 오랫동안 개인 행위자의 도덕적이고 인지적인 능력, 즉 능동성과 자발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것은 거울에 비추듯이 자신을 다른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역량이다. 이 내성 모델은 자연스럽게 성찰성에 대한 행위자적 관점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성찰이라는 현상에는 감수자적patiential 차원도 강하게 존재한다. 성찰은 행위자가 의식과 의향을 넘어서 "그에게 일어나는 것", 즉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감수자적 성찰은 자기를 스스로 들여다보는 실천이나 장치를 통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촉발되어 진행된다. 사건이 흔들어 놓은 일상적 감각의 사이로, 자신의 존재에 가차없이 드리워지는 성찰의 빛에 폭력적으로 노출되었을 때, 도덕적인 반성이나 인지적인 자기-모니터링과 다른 형태의, 좀더 폭력적인 성찰이 발생하고 그 결과 성찰적 주체가 형성된다. 이미 존재하는 행위자가 성찰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성찰의 힘이 행위자에게 가해지고, 의도하지 않았던 자기이해와 자기직관이 일어나는 것. 이런 성찰의 페이션시는 개체의 인지적, 도덕적 반성에 비해, 훨씬 더 집합적이고, 정동적이고, 전염적이며, 파괴적일 수 있다.
자기 해체의 불안은 트라우마적이다.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류세의 빛이 던져지는 자리는 변형적 생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가동되는 파국주의적 성찰성은 횡잔적 집합성을 가동시켜, 새로운 도주선들을 창조한다.
해러웨이가 말하는 '친족 만들기'는 양심과 도덕과 윤리의 내면적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찰적 파국을 어떻게 조직하느냐, 성찰적 파국이 방출하는 파상력, 즉 파국적 페이션시를 어떻게 조직하느냐 하는 인류세적 정치의 가능성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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