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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texte

몸, 신체의 수행성

by jemandniemand 2020. 8. 31.

protest, performativity, post-truth - the legacy of 1968

 

[벤야민, 이글턴, 그리고 바흐친의 정치적 몸학]

 

이글턴은 '고전적 슬픔'이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팽배해 있으며, 이러한 우울이 주로 프롤레타리아의 패배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이글턴은 벤야민의 성찰에서 이러한 괴로움이 가장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곧바로 그의 토성적 기질이 입심 좋은 역사주의적 신화들에 시한폭탄을 설치한다고 덧붙인다. 이번 경우에도 벤야민이 나쁜 쪽을 통해 전진하는 점은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의 이러한 역설적 의의를 바흐친과 겹쳐놓는다. 물론 바흐친의 카니발과 벤야민의 울부짖는 고통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벤야민의 구원이 부정적 이미지에 머문다면, 바흐친의 유토피아는 실질적 생기로 넘쳐난다. 그럼에도 벤야민의 비극적 우울과 바흐친의 희극적 활기가 필연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이글턴의 주장인데, 여기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정치적 몸학'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연구의 시급한 요청이다. 이는 곧 역사적 육체의 정치적/리비도적 생산에 대한 연구로서, 이를 통해 정치적 육체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것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이글턴은 바흐친의 정치적 몸학이 벤야민의 작업에서 묻혀 있는 것, 부정적인 양식으로 현존하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 바흐친적 카니발과 벤야민적 파국이 모종의 우회로를 거쳐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이글턴은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거쳐 브레히트 연극의 희극성을 논의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희극적 전망을 예시한다. 그러나 이글턴은 벤야민을 비롯한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머로부터 그리 많은 것을 배우지는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이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안타깝게 잃어버린 역사적 유물론의 측면을 상기시켜준다고 말한다. 즉,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넘어 "대중의 힘이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패배할 수 있겠는가?"라는 구호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글턴은 벤야민을 트로츠키와 연결시킨다. 벤야민의 반역사주의를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비추어보면서, 이글턴은 벤야민의 시대와 그의 '지금이라는 시간'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는다. 그리고 벤야민의 작업을 역사적 연속체로부터 폭파시켜 그의 반역사주의를 재활성화하는 일이 오늘날 그 어느때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https://pnuhuman.pusan.ac.kr/bbs/pnuhuman/11468/716377/artclView.do

 


[몸의 정치학: 크리스테바 비판]

 

충동과 충동의 재현물은 동시에 존재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충동의 재현물이 충동에 앞서 있다고 생각하는 버틀러의 계보학적 입장에서는, 원초적 충동을 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한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이미 실패한 전복 이론이다. 무엇보다도 욕망을 억압한다고 일컬어지는 법이 바로 욕망의 원인이 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원인으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그런 욕망이 원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 제도담론의 기율 권력효과이다. 모성적 몸, 어머니의 몸을 전 담론적인 것으로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고도로 담론적인 책략이며 특정한 권력관계를 확장하면서 그 사실 자체는 은닉하는 고도의 전술이기 때문이다. 

 

리스테바에게(1) : 기호계나 코라는 해방담론이 될 수 없다.

유아가 언어적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언어 이전의 전-담론적 기호계, 즉 어머니와의 이상향적인 근본적 관계를 포기해야한다. 유아가 상징계로 이행한 다음에도 아버지의 법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는 잉여물이 출몰하는데, 그것을 크리스테바는 기호계의 잉여물, 혹은 ‘코라’라는 모성적 대상으로 설명. 코라는 원초적 리비도의 다성악, 혹은 다원적 욕구로서 상징적 질서와 법에 출몰하여 상징언어에 균열을 일으킨다.(시적언어의 혁명성)

  -> 그러나 상징계를 내파할 수 있는 혁명적 힘을 가진 리듬,맥박,고동,유운,억양,소리작용,반복 같은 언어의 잉여물은 상징적 언어로 발화되기 어려우며 기호계가 의미화되지 않고서 어떻게 혁명성을 담지할 수 있는지? 오히려 이런 전복력의 리비도적 기원은 문화나 언어질서, 상징체계 안에서 이해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신병의 경계에 접하고 있다.

 

크리스테바에게(2) : 왜 동성애가 정신병 담론 안에 갇혔는가

모성적 몸이 일관되고 분명한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성적인 몸과 관련된 시적 언어도 정신병과 접경해 있다.(벨리니의 모성성Motherhood According to Giovanni Bellini)

언어 안에 나타난 여성의 기호계적 표현물을 보면 모성성으로의 귀환은 담론 이전에 있는 동성애와 연관된다.

  -> 이런 동성애는 정신병의 경계에 있다. 시적 언어는 상징계에 참여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유지되며 언어적 소통의 규범이 된다고는 했지만, 동성애도 사회적 표현물이 될 수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크리스테바가 동성애의 정신병적 특성을 주장한다고 비판. 이성애가 상징계의 토대와 동시에 발생한다는 구조주의적 가정을 수용한 셈..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동성애적 욕망의 카섹시스는 시적 언어나 출산 행위처럼 상징계 안에서 허가된 위치 변경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성은 출산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와 연결되며 그에 따라 자기자신이 어머니가 된다고 주장한다. (「언어 속의 욕망: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호계적 접근 Desire in Language」) 여성은 모성성의 동성애적 국면을 활성화하게 된다는 것. 이 국면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본능적 기억에 더 근접하는 동시에 정신병에 더 빠지기 쉽고 그에 따라 사회적이고 생산적인 유대에 대해서는 더 부정적이 된다고 주장. 어머니와 딸의 분리는 어머니와 딸 둘 다에게 우울증을 가져올 수 있다. 모성적 몸은 몸에 대한 부정으로 내면화되고 여아의 정체성은 상실, 결핍, 결여가 된다. 여성적 에고는 모체와의 분리에 우울증적으로 반응하는데 그에 따라 여성 동성애는 문화 안에 등장하는 정신병으로 설명된다.

동성애적-모성적 국면은 언어의 소용돌이이자 의미와 시선의 부재, 또한 모성적 몸에 대한 상상의 밀착. 또 그 모성적 몸은 여성을 향한 돌진을 막는 은폐막이며 상실한 낙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허나 이런 동성애는 여성에게 시적으로 구현되며 사실 출산과 함께 상징적 관점에서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기호계의 형식이다.

 

->크리스테바에게 공적인 동성애란 문화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활동이다. 매개되지 않은 여성 동성애 욕망의 카섹시스는 정신병으로 이어지며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는 본래부터 인식불가능한 것이다. 레즈비언이 문화의 대타자로 투사되면서 레즈비언의 발화가 인식불가능한 ‘단어 소용돌이’로 특성화된다면, 법의 이름으로 레즈비언 경험을 추방하면서 부권적-이성애적 특권이라는 궤도를 유지하게되는 것이 아닌가?

 

크리스테바에게(3) : 물화된 모성성으로 빠져서는 안 된다

크리스테바는 기호계의 위상을 강조하고, 부권적 상징질서 이전의 모성적 몸이 갖는 혁명성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을 부각시킨 기호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몸에 대한 강조는 여성과 어머니를 등치하면서 이성애 중심주의의 재생산성을 강조할 위험이 있다. 재생산하지 않는 레즈비언이나 자발적 비혼을 선택한 사람, 결혼은 했지만 출산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은 여성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기호계와 코라에 대한 강조는 전체 여성의 몸이 아닌 어머니의 특정한 몸을 이상화한다. 그에 따라 모성성을 물화시키거나 모체가 아이를 임신한 상태의 맥동적 교류를 신비화할 수도 있다. 특히 이 경우 모성성이나 어머니의 몸은 문화적 구성물로 설명되기 보다는 생물학적 본질로 이해될 가능성이 높다. 상징계의 강력한 패권 질서 속에 가끔씩 출몰하는 기호계적 침입의 혁명성은 사실상 상징계 안에 그 의미가 발화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을 전제할 때에야 가능하다. 즉 시적 언어가 의미화될 수 없는 기호계적 특성이라면 상징계에서는 정신병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다는 이 ‘불가능한 해방담론’이 비판을 받는 것이다.

 

http://www.nomadist.org/s104/A3_Seminar_data/81181

 


[들뢰즈와 가타리_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이진경)]

 

중요한 것은 유용성의 형태로 혹은 당연시된 척도의 형태로 혹은 익숙하게 몸에 벤 낡은 습속의 형태로 작용하는 권력, 혹은 권력과의 대결을 조직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대칭적 양상의 권력을 포착하는 것이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신체적인것은 그에 상응하는 특정한 사물의 상태를 갖는다. 비신체적인 것은 하나의 신체적 상태와 다른 신체적 상태 간의 관계 내지 신체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지시함. 이를 표면효과라 일컬음. 신체적 변환 및 신체적 혼합 상태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기계적 배치와 연관됨. 신체적 변환을 수반하지 않는 비신체적 변환은 의미가 없다. 

사건은 어떤 신체적 상태에 대한 지시가 아니라 어떤 신체적 상태가 다른 신체적 상태와 계열화됨으로써 만들어진다. 사건은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경계, 사물의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의 경계에 위치한다. 

 

공통감각과 공통의미는 '방향'이 아니라 '기관'의 의미를 갖는다. 일차적으로 유기체 전체가 단일한 통일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각각의 기관들이 '공통의 방향'을 취하는 것이고 이로써 통일된 '공통의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공통감각은 정신의 다양한 능력이나 신체의 분화된 기관들을 포섭하며 '나'라고 불릴 수 있는 통일성 혹은 단위에 연관시킨다. 

 

특이성의 수렴을 세계를 종합하는 규칙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세계 및 개체의 구성을 '수동적 발생'이라 부른다. 이를 존재론적 측면과 논리적 측면으로 구분한다. 존재론적 측면은 특이성과 사건에서 시작해서 의미는 그것이 실행되는 첫번째 복합체를 만든다. 특이성들을 조직하는 환경, 이러한 세계를 표현하는 개체, 신체상태, 개인들의 혼합 내지는 집계, 이러한 상태를 서술하는 분석적 술어 등이 그것. 

그다음 두번째 복합체가 만들어진다. 다양한 사람들에 공통된 세계, 공통된 무언가를 정의하는 인격체, 이 인격체를 정의하는 종합적 술어, 이로부터 파생되는 계급과 속성들이다. 신체적 조건(환경) 안에서 생산되는 양식이나 그런 환경에 의해 생산되는 '공통감각' 내지는 공통된 인격체(주체)의 문제는 표면 내지 표면효과로서 사건을 특정한 양상으로 반복하여 조직하는 권력의 문제임이 드러난다. 

 

예술가가 작품으로 보여주려 하는 비가시적인 것을 들뢰즈는 '힘'이라 부른다. 예술작품이란 그것이 포획한 재료를 통해서 우주적인 힘을, 그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이라 하고, 이러한 생각을 '표현주의'라 한다. 이것은 주관의 감정을 대입해 대상을 표현하는 '표현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표현주의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것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기적인 것은 표상작용의 형식이며, 표상작용을 주체와 결부시키는 감정이다. 유기체란 각각의 부분들을 '생명'이라는 하나의 특권적인 중심을 위한 '기관'으로 기능하게 하는 통합체다. 유기체라는 관념 아래서 신체의 모든 부분은 그 특정한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고정된다. 

 

https://thirsty.tistory.com/entry/%EB%93%A4%EB%A2%B0%EC%A6%88%EA%B0%80%ED%83%80%EB%A6%AC%EC%82%AC%EA%B1%B4%EC%9D%98-%EC%B2%A0%ED%95%99%EA%B3%BC-%EC%97%AD%EC%82%AC%EC%9C%A0%EB%AC%BC%EB%A1%A0

 

 

[불멸의 생명정치 (보리스 그로이스)]

 

 

https://blog.naver.com/lotmania/221534594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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