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명백한 현상인 동시에 모호한 현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몸의 생물적 특성과 사회적 특성이다.
몸이 외부의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와 환경에 노출됨으로써 몸의 모호성은 증대된다(Harris,)
우리의 몸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몸을 훈련시키는 방식에 달려 있다(Haug, 1987).
프랭크(Frank, 1991)가 지적했듯이, 이와 같은 구분은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반영하는데, 이는 몸의 '자연적' 특성과 성향을 간과하면서도 몸을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가정하는 경향이 있고 몸 관련 문헌에 만연해 있다. 그러나 인체는 수천 년 동안 진화해 오면서 사회적 관계의 아주 실질적인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몸은 단순히 사회적 관계의 구속을 받거나 사회적 관계로 둘러싸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관계의 기초가 되고 그 관계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몸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왜 그러한 사회적 중요성을 띨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터너(1992a)는 몸에 관한 그의 최근 저작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법은 몸이 다른 형상보다 다소 쉽게 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시사하는 점에서, 그의 최근 저작은 1984년 발표했던 <몸의 질서 이론>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터너는 몸의 특정 측면들이 다른 측면들에 비해서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기 쉽다는 사실을 사회구성주의자들이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사회학자들은 건강과 질병이 사회적 구성물로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인간의 키에 관한 판단도 비슷하게 개념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Turner, 1992a:106).
프랭크는 물질적인(corporeal) 몸의 분석에 중점을 둠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본다.
더글라스의 인류학(1966, 1970)은 몸이 사회적 의미의 수용체이며 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몸은 가장 쉽게 이용될 수 있는 사회체계의 이미지로서, (...) 또한 사회의 특정집단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몸 취급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몸은 무엇보다도 전체로서의 사회를 나타내는 은유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국가의 경계와 정체성이 위협받는 사회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몸의 순수성 및 경계를 유지하는 데 보다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경향에서 잘 드러난다. - 위기의 상징론.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몸에 대한 관심으로 투사된다는 관점. 사회적 관계와 환경의 불확실성과 위기에 대한 불안감은 몸에 대한 관점으로 투사되고 있다. - 벡이 '위험사회'로 일컬은 곳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몸이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그러나 때때로 개인적 몸의 현상학을 사회적 몸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지위와 범주들로 환원시킴으로써 이 두가지 몸을 모두 와해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의학적 지식, 욕구, 치과업, 복지국가 등의 쟁점과 같은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몸에 관한 다른 많은 연구들 역시 푸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예를 들어 Armstrong, 1983, 1987; Davies, 1990; Hewitt, 1983; Lash, 1984; Nettleton, 1991, 1992).
고프만의 연구에서 몸의 운용은 만남, 사회적 역할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아 정체성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몸의 사회학_크리스 쉴링_임인숙 역_나남_2011
게스투스
샹탈 아케르만은 [잔느 딜망]에서부터 이미 '충만함 속의 몸짓들'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방안에 틀어박힌 [나, 너, 그, 그녀]의 여주인공은 날짜를 세어가며, 일종의 거식증의 의식이라 할 기다림의 양태로, 은둔자 같으면서 유아적인, 혹은 퇴행적인 신체의 자세를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샹탈 아케르만의 새로움은 이렇게 여성인물이 갖는 고유한 신체의 상태들에 대한 기호로서의 몸의 태도들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있는 반면, 여기서 남자들은 사회, 환경, 그들에게 떨어진 몫, 그들이 끌고 다니는 단편적 이야기들을 증언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성의 신체들의 상태로 이루어진 사슬은 닫힌 것이 아니다. 어머니로부터 내려오거나 혹은 어머니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 사슬은 자기 자신밖에 이야기할 줄 모르는 남자들에게 계시자의 역할을 하거나, 더욱 심층적으로는 방의 창문을 통해서나 기차의 유리창, 즉 전적인 소리의 예술을 통해 단지 보이거나 들릴 뿐인 환경에 대해 그러한 계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혹은 공간 속에서, 여자의 몸은 시대와 상황, 장소들을 통과해가게 하는 이상한 노마디즘을 획득한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문학에서의 버지니아 울프의 비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체의 상태는 각각의 조응하는 태도들을 연결하는 느린 제의를 분비하면서, 인간의 역사와 세계의 위기를 포착하는 여성적 게스투스를 펼친다. 신체에 반응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게스투스이다. 어쨌든, 인무로가 영화를 그 안에 가두어버릴 소지가 있는 양식화의 과잉을 피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것이야말로 샹탈 아케르만 자신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이다. 게스투스는 그 어느 것을 버리지 않고서도 소극이 될 수 있으며, 영화에 가벼움과 저항할 수 없는 명랑함을 줄 수 있다. 이미 [밤새도록]이 그러했고, 특히 [20년 후, ---가 바라본 파리]의 에피소드가 그러한데, [배고파, 추워]라는 제목은 자체로 아케르만의 작품 전체, 혹은 발라드의 동력으로서의 소극화된 모든 신체의 상태를 다시 시동시키는 것 같다.
- <시간-이미지, 영화 2> (1985) 들뢰즈
행동들이 단순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며 등장인물간의 관계와 긴장을 파악하게 해준다.
신체는 행동으로 수렴되거나 행동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로부터 유래하여 신체를 지시하는 태도나 자세들을 보여주는 신체인 것.
스피노자의 신체는 행동하는 신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신체, 탈행동의 신체이다.
감정 자체로 신체의 몸짓을 지칭하는 상태, 비유기적 신체
신체기관을 뛰어넘어 기관들 사이의 틈새에서 생겨나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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