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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_질 들뢰즈_허경_그린비_2019

by jemandniemand 2020. 9. 11.

 

목차

약어표

I. 문서고에서 다이어그램으로
1. 새로운 문서고학자 ―『지식의 고고학』
2. 새로운 지도제작자 ―『감시와 처벌』

II. 위상학 : “다르게 생각하기”
1. 역사적 형성작용 또는 지층 :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 지식
2. 지층화되지 않은 것 또는 전략 : 바깥으로부터의 사유 ― 권력
3. 주름작용, 또는 사유의 안쪽 ― 주체화

부록_인간의 죽음과 위버멘쉬에 대하여
옮긴이주

‘주름들 안의 삶’ ― 들뢰즈의 푸코 해석(허경)
옮긴이 뒷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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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위상학: "다르게 생각하기" (Topologie: "Penser Autrement")

cf. 토폴로지 - 지올로지(geologie) 거의 동의어로 씀. 공부한 부분에서 지층이라는 말은 <천개의 고원>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지리철학의 구도에서 끌고 감. 들뢰즈는 이미 60년대 <의미의 논리>에서 위상학/지리학을 강조했음. 지리철학은 들뢰즈 형상학의 중심에 있는 개념. 지리적인 상상력, 

 

 

들뢰즈가 보기에 저항과 반복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바깥의 선'. 하나의 위상학적인 도식으로 정리했음. 

(1장은 3, 2장은 2, 3장은 1을 다룰 것)

 

 

 

 

1 역사적 형성작용 또는 지층: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 지식(의 고고학) -신칸트주의

<-> 끌어들이는 것이 '현상학적인 지식'의 개념과의 대별성

 

언표의 우위 / 가시성(보기)의 환원불가능성 - 언표에 의해 하위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푸코에게 savoir와 connaisance가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해야 할 지점 - 푸코의 지식 개념(앎 혹은 지식)

92쪽-94쪽 새로운 문제 주제를 꺼내놓고 논의를 펼치고 있음 - 주제어: 고고학의 이중적 의무(임무): 언표를 추출하는 것과 가시성을 추출하는 것. 말을 쪼개서 언표를 어떻게 추출하는가? 그렇게 추출된 언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언표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갖는 독특한 의미/독창성은 어디에 있는가?

100-105 가시성에 대해 논함. 지층(역사적인 형성물) 해당하는 지식을 구성하는 형식은 언제나 외재적인 exterior 관계에 있다 

 

푸코 지식 개념을 적극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면, 기본적인 특징은 '이원론'에 있다는 것. 

'이원론'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원론이 있다. 첫째, 우선 데카르트에 있어서의 두 실체 또는 칸트에 있어서의 두 능력과도 같이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보여주는 참다운 의미의 이원론이 있다. 둘째, 또한 스피노자 또는 베르그손과 같이 일원론을 향해 도약하기 위한 잠정적 단계로서의 이원론이 있다. 셋째, 다원론의 한가운데서 작동되는 일종의 예비적 재분배로서의 이원론이 있다. 

--> 105-121 푸코의 신칸트주의라는 제목으로 집약해볼 있음. 제일 중요한 부분으로 강조할 있음. 하위주제는 부연에서 설명하는 받쳐주고 있음. 이원론적인 지식개념이라는 유사성에 대해서 설명을하자면, 칸트는 삼가논리(데카르트의 코기토와 달라지는 지점)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속한다(105-107) 두번째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니체의 일의성의 테제 

 

 

-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 지점

<지식의 고고학>이 이러한 이원론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단계이고, 이것이 <감시와 처벌>에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들뢰즈의 논지이다. 

"실증성 또는 경험성으로 불리는 지층들은 언제나 일련의 역사적 형성작용들이다. - "퇴적충돌"은 사물과 말, 보기와 말하기,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가시성의 해변과 가독성의 들판, 내용과 형식에 의해 형성된다." - 보기와 말하기 이것은 주로 현상학의 탄생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이고. 내용과 형식은 옐름슬레우의 이야기. 이중분절 개념이 유사 논리학의 위치에 올라서게 됨. 옐름슬레우를 끌어들여서 푸코의 이원론을 설명함 - 들뢰즈의 철학 또한 존재론을 관통하는 중요한 이원론이 있다. 다양한 다양체 속에서 다시 통합되는 다원론적 구도 안에서의 이원론이기는 하지만, 푸코를 설명하면서 다시 자신의 이원론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함. 

직관적으로 몇가지 예를 들어 보면, <말과 사물> 각 시대는 저마다의 보기 말하기의 형식을 지닌다. 각 시대의 고유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보기와 말하기의 어떤 혼합체이다. 푸코적인 의미의 지식이 되는 것은

에피스테메의 기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말과 사물인데.. 시대마다 말과 사물의 관계에 따라 에피스테메가 달라짐. 

 

cf. 임상의학의 탄생: 서양에서의 임상의학이 의학의 시선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책. connaisance 가 아니라 savoir라는 것. 두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도 상당히 주의해서 식별해서 이해해야 할 문제(지식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차적인 것) - 말할 수 있는 것, 사물, 보기의 대상. 임상의학의 탄생에 나오는 이야기로 돌아가면, 증상에 대한 연구가 말하기와 보기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말하기라는 것은 의학이론이고, 보기의 차원은 증상 또는 병든 신체. 이 이론의 차원하고, 임상적인 관찰의 차원의 결합에서 하나의 지식, 하나의 이론을 성립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이 두가지가 우리가 소쉬르의 자의성 체계로 돌아가서 얘기할 필요가 있는데, 필연적인 이유가(선험적인 자연적인 이유)가 없고 역사마다 시대마다 다 달라진다는 것.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의학으로 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이론에 의해서 압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앞에 그 관찰한 내용이 지각의 내용이,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어긋나면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 명백하게 관찰되고 경험되는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비껴가면 의미있게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 르네상스 시대의 의료학은 말하기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고전주의 시대에서는 임상경험이 더 중요해지는 것 - 보기와 말하기가 어떤 평행에 이르게 됨. 해부학이 등장하면서 관계가 또 전도하는, 그런 르네상스시대 고전주의 시대, 이른바 근대. 말하기와 보기(말과 사물)의 차원이 방대한 차원으로 변화한다. 말과 사물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물은 말 사이에 있고, 말과 사물이 똑같은 상징기호적인 위치에 있고, (...)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서면 말과 사물이 완전히 얽혀있다가 말이 사물로서 간주되고, 사물이 말로 간주되는 이런 시대가 지나고, 말과 사물이 완전히 분리되고 표상과 재현으로. 근대에 가서는 이런 재현의 투명성이 사라져서 말과 사물의 관계가 작동되기 시작함. 그런 지식의 역사라는 것은 말/보기의 관계가 서로 다르게 성립하는 것. 말과 사물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

이것이 <감시와 처벌>에 가면 감옥이 되는게 보이는 거고 사물의 위치에 있음. 형법은 말과 이론의 위치 - 말하기의 위치에 있는데, 이제까지 얘기 중에서 빠뜨린 결정적인 것은 이 두 항이 서로 다른 진화의 논리를 갖는다는 것이고, 근대의 형법이론은 감옥과 무관하게 그자체로 탄생변화 진화해갔고, 감옥 또한 형법에 맞춰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변화되어 왔음. 이 두개를 이질적이고 이접적이고 어떠한 공통성도 없는 두 항이, 하나의 결합체로서의 지식으로 성립하는데 이것이 제3의 지식의 축이고, 이것은 지식이론, 고고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고 계보학에서 다루는 전략/다이아그램/도식

 

옐름슬레우(새로운 분배의 단초 역할)에서 표현과 내용의 형식을 가지고 와서 기표와 기의의 구도로부터 변화를 시도했음.  -이중 분절

'이중 집게' 자신의 구도를 통해 푸코를 분석하는 대목 - 표현과 내용(사물과 말) - 이질적인 두 범위가 어떻게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가? 통합된 작업으로 진입할 수 있는가? -- 도식론! 영역의 문제! 협동작업

표현 형식(언표): 형법 / 표현실체: 비행

내용 형식(가시성): 감옥 / 내용실체: 수감자, 죄수들

 

이원론적 지식론으로 접근해가는 것

지층은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의 분배를 통해 구성된다. 즉, 담론성과 명증성이라는 두 요소들의 조합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역사'란 각각의 시대에 있어 가시적인 것들 및 언표 가능한 것들에 대한 이런 결정작용과 직접적 상관이 있다.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 지층으로 옮겨가는 과정에는 가시성 자체의 양상 변화 및 언표 가능성 자체의 체제 변화가 생겨나기 때문에 분배상의 변이가 나타나게 된다. 

비이성을 가시화! (언표와 가시성의 조합으로 구성) - 두가지 요소와 하나의 시대는 동시적이다. 

(의학, 법률, 법규, 문학, 등에서 나타나는 비이성)

 

-- 현실적인 세계 칸트적인 의미의 현상계 - 들뢰즈의 지질 철학에서는 '지층'이라고 부름. 

사물과 말 보기와 말하기 볼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가시성과 언표. 예름슬레우적인 예. 

이런 예들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행했던 지층에 대한 최후의 위대한 분석에 의거한 것이다. 

 

가시성의 장소(초반에 강조했음 중시했음) -

지식의 고고학에서 나타나는 우위성의 문제는 본질적이다. 언표가 우위를 갖는데,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그 이유이다.

'임상의학의 탄생'의 부제는 '시선의 고고학'이다. - 가시적인 것이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언표 가능한 것에 대립시킬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언표 가능한 것의 우위성에 있다. - 푸코에게 있어 가시성의 장소들은 결코 언표들의 장과 동일한 리듬/역사/형식을 갖는 것이 아니다. 언표의 우위는 오직 이런 한에서만, 곧 환원불가능한 어떤 무엇에 대해 작용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갖는다. 

본인이 판단하기에는 현상학적 전제를 수용했을 때 가능한 것. 날것 그대로의 체험을 전제하고 있는 것, 푸코는 언표를 중요시하게 되면서부터 어떤 언표도 개입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체험을 거부함. - 시선으로만 지식에 도달할 수는 없음. 이것과 이질적인 언표에 의해 규정되는 한에서 선포되는 것. 광기의 역사에도 많은 현상학적인 요소가 들어있지만, 언표의 우위성을 잃지 않고자 함

하나의 "시대"는 자신을 표현하는 언표들과 자신을 채워 주는 가시성들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가시성 자체의 양상 변화 및 언표 가능성 자체의 체제 변화가 생겨나기 때문에 '재분배상의 변이'가 나타나게 된다. 

 

 

(107-110) 보기와 말하기의 본성상의 차이. 들뢰즈 철학에서 중요한 용어. 원래 보기와 말하기라는 용어는 사뭇 이질적이고 비관계 속에 있다. 그 속에서 어떻게 관계가 발생하는가? 에 대한 논의.

(110-113) 지식(의 놀이)들을 화두로. 프래그머티즘.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 이미 그자체로 완결된 지위. 인식의 상황을 기다리고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우리 인식의 행위 - 실천과 먼저 독립해서 존재하는 규칙/진리/선험적 인식의 형식이 없다는 것. 

(113-115) 푸코의 테제와 현대영화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공통적 속성으로 이접적 종합이 일어나고 있다. 푸코가 설명하고자 하는 지식개념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식이라는 것은 audio-visuel 차원이 결합된 . = disjunctive 보는 것과 말하는 사이의 부조화 - 차이와 반복에서부터의 인식론은 불일치의 일치 속에서 서로를 한계로 내몰고 그런 가운데 새로운 종합/새로운 일치, 인식론적 자체들의 재탄생. 그것에는 아르토의 생식성 개념으로 재구성 

 

들뢰즈가 강조하는 것: 드 그룹 중에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다. 언표의 차원 말의 차원이 훨씬 우월한 지위에 있고, 규정하는 위치에 있다. 이것 못지 않게 또 주장하는 것은 가시성이 비환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언표의 우위를 주장하면서도 보기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시선에 매혹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 가시적인 차원, 빛의 차원이 언표의 차원보다 하위에 있지만 이것이 다시 푸코에 의해 굉장히 중요한 탐구대상이 되고 있음. 열정적인 서술의 대상이었다. 

 

오디오 비주얼의 이접. 분리가 되면서도 결합되는, 어떤 종합을 이뤄내는 것. 이런, 푸코가 말하는 문서고가 이런 이접적인 시청각의 결합.

완벽한 예들이 영화에서 나타난다: 스트라움, 지베르베르크, 뒤라스. 특히 뒤라스의 <겐지스 강의 여자> <인도의 노래> 현대 영화를 보면 고전적인 영화에서는 내레이션하고 장면과 이미지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현대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audio and visual 이 따로 따로 논다) 보기와 말하기의 차원이 완전히 따로따로 가는것.

푸코는 동시대의 영화와 특이할 만큼 가까이 있다 "사물과 말에만 머무르는 한,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보며, 이때 양자는 서로 연계되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과 사물을 개방하는 순간, 우리가 언표와 가시성을 발견하는 순간, 파롤과 시각은 보다 우월한, 아프리오리의 실천에 도달한다." -우리 인식 능력의 경험적인 사용(상투적이고 상식적인 사용)에 머물러 있으면 그렇게 믿을수밖에 없다는 것(common sense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 우리 인식능력의 우월한 사용(초월적인 사용)은 common sense가 깨지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질적인 갈등/투쟁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내는 것 - 여기서 차이와 반복이라는 인용을 생각해야 함. - 푸코는 이제 자기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들뢰즈가 칸트의 숭고론을 다루는 대목 - 그런 분위기/문장이 그대로 살아나고 있음. 보기와 말하기가 자연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거부 - audio visual disjunction!

말하기와 보기 사이에는 단순한 불일치/이접 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서로에 대해 가해지는 공격들, 상대 과녁을 향해 쏘아진 화살들, 붕괴와 파괴를 위한 기도들, 던져지는 창들 그리고 상처, 하나의 전투가 존재한다...".  - 단순히 상동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형식들이 마치 하나의 전투처럼 서로에 침투하고 포획하고 있음. - 부조화의 조화(불일치의 일치) 

푸코에게서는 지식을 구성하는 두 요소 간의 불일치의 일치(전투)가 일어난다는 것. 

 

두 형식들 사이의 이질성

그러나 때로는 이 두번째 대답 조차도 충분치 못하다 - 상호 외재적인 두 형식을 묶는 새로운 심급: 칸트의 도식이다. (120페이지) 따라서 칸트는 이 두 형식들을 넘어서는 세 번째 심급을 도입해야만 했다. 이 세번째 심급은 본질적으로 "신비한" 것이며, 이들 사이의 상호 적응성을 '진실'로서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상력(구상력)의 도식이었다. 

- 또다른 하나의 차원: 제3의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해야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너무나 차분한 이야기가 될 정도.. - 말하기와 보기 두 차원의 비상동성/비연속성/영원히 만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띠를 말해주는 것이다 (상호 갈등과 전투/ 상호 포획)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사이에서 우리는 두 형식들 사이의 이질성, 본성상의 차이 또는 부동형성, 그리고 상호 구속 및 포획이라는 두 형식들 사이의 상호적 전제, 마지막으로 다른 것에 대한 하나의 결정적 우위 등과 같은 다양한 측면을 동시에 유지해야만 한다. - 가시적인 것이 갖는 환원불가능한 고유한 특성 - 양자 사이의 구속과 포획 - 이런 것으로도 푸코의 이원론을 설명하지 못한다..... 

 

 - 과격한 관계로 가서 양자 사이의 상호포획과 마주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119 ) 말과 사물 - 언어와 이미지가 서로에 창을 던지고 상처를 입히는 관계에 있다. 극단적으로는 단순히 이접적인 관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투.

 

 

칸트가 감성/지성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구상력을, 또 그것이 생산하는 도식을 끌어들인 것처럼 제3의 심급으로 올라서야 한다는 것.

칸트는 이미 이와 비슷한 모험의 길을 횡단했다. 지성의 자발성은 오직 직관의 수용성이 자신의 규정 가능성 형식을 규정작용의 형식에 끊임없이 대립시키는 경우에만, 직관의 수용성에 대해 자신의 규정 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칸트는 이 두 형식들ㅇ르 넘어서는 세 번째 심급을 도입해야만 했다. -- 이것이 바로 상상력(구상력)의 도식이었다. 

 

푸코에게서도 이 이원론적인 대극구조를 극복할 제3의 심급이 필요하고, 그것은 또 칸트의 도식과 대단히 유사한 것이었다. - 푸코가 말하는 전략 또는 다이어그램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 시대의 지식을 구성하는 두 배타적인 항을 묶어주는 원리인데, 이것은 권력에서 오는 것. 

언표와 가시성을 통합하는 매개하는 것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 

칸트의 도식에 해당하는 전략(다이어그램)을 생산하는 것은 더이상 상상력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권력이다. 그것이 훈육적이든, 생명관리든, 종류에 따라서 보기와 말하기를 서로 다르게 엮음. 

푸코적인 의미에서 지식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connaisance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가시성과 언표는 말과 사물에 어떻게 분별되나? 보다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음. 

 

실상 푸코에 의해 새롭게 개념화된 지식은 오직 매 지층, 매 역사적 형성작용에 고유한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의 조합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지식 이전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은 언표들과 가시적인 것들이 빚어내는 하나의 "장치"이자, 실천적 배치이다. 

지식은 다양한 문턱들에 분포되어 있는 지층의 단위이다. 지층 자체 역시 오직 다양한 방향 설정 아래에 있는 이러한 문턱들의 축적으로서만 존재한다. "참다운 표현형식"의 발견..

 

푸코는 특히 '시니피앙' 개념을 비판한다. 

언표는 다양한 단위들을 가로지르는 기능이며, 시니피앙의 체계보다는 오히려 음악에 더 가까운 하나의 능선을 따르는 것이다. 

내용형식은 어떤 사물의 상태(etat de choses) 또는 지시대상이 아니다. 가시성은 더 이상 성질, 사물, 대상 및 대상들의 조합과 같은 가시적인 요소들, 보다 일반적으로는 감각적인 요소들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 우리는 사물들을 절개하고 분쇄해야만 한다. - 가시성은 빛 자체에 의해 창조되어, 사물들 또는 대상들을 오직 반짝임, 빛남, 섬광으로만 존속시키는 밝기의 한 형식이다. 

단어와 문장과 명제를 개방하라. 성질과 사물과 대상들을 개방하라.고고학의 임무는 루셀의 기획처럼 이중적이다. 고고학은 단어와 랑그로부터 각각의 지층과 문턱에 대응하는 언표를 추출해야 한다. 

근대 사회의 고유성은 성을 어둠 속에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성을 하나의 비밀로 취급함으로써 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도록 조장한다. 

 

언표 고찰 방법론: <지식의 고고학>에서 지층화 두 요소들에 관한 일반화된 이론 형성, 방법론적 결론이 된다. 두 요소 사이의 관계는 독특하다. 언표는 가시성에 비해 우위성을 가지고, 가시성은 언표로 환원되지 않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면서 둘 사이의 "비-관계"로서의 관계가 형성됨. 발생적 현상학에 비판적. 

 

중요한 부분은 지층의 두 형식이라기보다는 두 형식으로 나누는 푸코의 이분법. 이것은 데리다/칸트적인 이분법도 아니고, 스피노자/베르그손적인 이분법도 아닌, 다원주의적 다양체주의적 이분법.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푸코 사상 자체에서도 중요하지만 들뢰즈 사상 자체에서의 중요한 일면이라는 것. 에름슬레브의 이중분절 이론을 도입해서 <천개의 고원>에서 지층 개념을 펼쳤지만, 여기서는 푸코의 전 저작을 관통하는 이분법을 재구성했음. 

87쪽 Histoire/푸코의 대문자 역사. '각각의 지층들은 말하는 방식과 보는 방식, 담론성과 명증성이라는 두 요소들의 조합에 의해 형성된다. 한편 하나의 지층에서 다른 하나의 지층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는 이 요소들 및 요소들 사이의 조합에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푸코가 역사에 기대한 것은 각각의 시대에 있어 가시적인 것들 및 언표 가능한 것들에 대한 이런 결정(determination)이다. - 대문자 역사 Episteme의 역사라는 것은 보기와 말하기(가시적인 것과 가언적인 것)가 결합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역사이다. - 문학의 도래와 더불어 무너진 것. 푸코적인 역사도 다루고 있음. 

 

 

 

* 이중분절: 표현과 내용 사이의 분절, 형식과 실체 사이의 분절

 - 거의 푸코의 모든 저작에 나타나는 이분법을 정리하고 있음

들뢰즈가 강조한 것은 근대사회에서의 감옥과 형법이론이 동시에 협공작업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감옥은 그 자체의 이유와 상황 속에서 생겨났고(판옵티콘 - 가시성의 차원) 그럼에도 이 두가지 외재적인 두 형식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 권력의 다이어그램이다. 고고학과 계보학이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결국에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은 권력의 계보학에서 완성될 수밖에 없다. - 감시와 처벌(푸코의 이분법이 원숙한 단계에 이르게 된 것)

 

*지식과 지층의 관계: 지식은 투명한 시선을 통하여 지식으로 파악되기 이전의 대상은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 이전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지식은 그 자체로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초-역사적인 투명한 시선이라는 것은 허구에 가깝다. - 프래그머티즘 (들뢰즈의 노마디즘과 유사)

 

*고고학의 이중적 임무(루셀의 이중적 기획)

첫번째 임무: 언표 추출 - 추출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 "왜 언표를 추출해야 하는가?"

"각각의 시대는 자신의 언표 조건들에 의해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95)

cf. 빅토리아 시대 성과 관련된 담론들이 고백되고 폭로되도록 만드는 조건들을 파악할 수 있다면, 언표는 은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탈-은폐되게 된다 

사물의 언어에까지 도달하려는 현상학적 언어학과 대별되는 새로운 언어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푸코의 '언표' 개념. 언표체제(regime)는 언제나 체제를 이루고 체제 속에 있어요. 반면에 가시성은 기계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판옵티콘 같은 추상기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가시적인 것은 기계적이고 언표는 체제를 이루고 정치적인 것/권력의 차원과 분리할 수 없는 것. 

 

 

 

말의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문제/의미를 표현하는 말 -그것은 언표 개념에서 찾는 것 같음. 

("그러므로 푸코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표가 전제하는 이 특이성들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었다." 언표는 현실성의 영역에 있는 것도 잠재성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강도적인 것이고 독특성 singularity를 표현함. 여기서는 점들을 잇는 곡선이 언표라고 표현함) - 언표를 구성하는 힘관계는 상호소통/울림/공명/에피파니를 일으키는 단어. 거기에 적용하는 힘관계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문서고 속에서 권력의 유형을 찾을 수 있음. 고고학은 기본적으로 권력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음. 

*언표의 가장 일반적 조건: 주체의 배제 

주체는 하나의 변수, 차라리 언표가 갖는 변수들의 집합. 주체는 언표 자체로부터 파생되는 하나의 기능 - 익명적 중얼거림 안에서 가능적 주체들이 배치된다.  "나는 내가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말에 감싸여, 모든 가능한 시작 너머로 옮겨지기를 바랐다. 나는, 내가 말을 하는 그 순간, 이름 없는 어떤 목소리가 이미 오래전에 있는 것이라고 바라고 있었다."

cf. 언어(랑가주): 랑그/파롤

 

현상학적 접근: 사물 자체가 말하는 데까지 가는 것. 사물의 언어. 

언표가 무엇이다는 긍정적인 정의는 해석자들의 작업으로 남겨짐. - 프랑스 타자기.. 이것은 단어도 아니지만 권력관계가 투영된 것.

언어철학에서는 배제하는 것들

언표 조건으로서 코푸스가 역사적 아프리오리를 구성하고 있다. 

특정의 코푸스(말뭉치, 자료집)를 통해 언표 규칙을 추출한다. - 교회에서 고해성사를 통해 어떤 파롤이 발현되고 있는지, 등. 

특이하고, 유한하고 규정되어 있다. - 랑그와 대비되고 있음.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 (지식의 고고학으로 봤을 때 랑그는 유한한 규칙들로 무한한 발화를 가능하게 함) - 각각의 시대는 자신의 코푸스에 의거, 언어작용을 모으는 자신만의 방식을 갖는다. 

 cf. 모뉴멍(monument) / 도큐멍(document) : 희소한 것과 희소하지 않은 것. 각각의 언표들을 사건으로서 이해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가시성의 추출: 가시성은 어떤 사물의 상태 또는 지시대상이 아니다. 가시성은 더 이상 성질, 사물, 대상 및 대상들의 조합과 같은 가시적 요소들, 더 일반적으로는 감각적인 요소들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 빛의 체제로서 가시성: 하나의 빛이 있음 - 빛의 존재 - 빛-존재. (가시성들은 차라리 능동과 수동, 작용과 반작용들의 복합체들이며, 빛 속에 드러나게 되는/빛으로 나아가는 (that emerge in the light) 다중-감각적 복합체들이다. 

 


 

2 지층화되지 않은 것 또는 전략: 바깥으로부터의 사유 - 권력(의 계보학) - 니체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인간의 규율로부터 해방될 때,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으로서" "저항하는 힘들의" 집합으로서의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3 주름작용, 또는 사유의 안쪽 - 주체화(의 윤리학) - 블랑쇼와 루셀

푸코 철학 안에서 '분신'에 대한 주제를 주름의 개념과 연관시키는 대목이 중요. - zwiespalt twofold

 

푸코에 따르면, 권력의 분산된 중심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우선적인 저항점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에 맞서는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163)

 

우리의 주체성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이제 주체에게는 전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인데 이는 주체가 마치 지식을 주체화하고 권력을 휘어지게 만드는 주름들의 방향 설정을 따르는 하나의 저항점처럼 매번 새로이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주체성은 법에 지나치게 예속되어 있는 욕망에 대항하여 육체와 그 쾌락을 되찾을 것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리스인들로의 회귀가 아닌데, 이는 회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적 주체성을 위한 투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실적 형식을 갖는 예속에 대한 저항을 통과한다. 첫째는 권력의 제반 요구들에 따라 우리의 개별화를 구성하는 예속의 형식이며, 두 번째는 각각의 개인을 이미 잘 알려지고 인식되어 있으며 언제나 항상 결정되어 있는 하나의 정체성에로 결합시키는 예속의 형식이다. 

 

안감을 만든다는 것은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겉감을 안으로 말아서 내부의 공간을 만드는 동시에, 옷을 두 겹으로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레몽 루셀>은 안쪽이 언제나 이미 전제된 바깥의 주름 작용이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doublure'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미들을 접합하고 꿰맸다.

 

 

<쾌락의 활용>에서 푸코는 주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상, 푸코는 이미 주체를 하나의 파생물, 즉 언표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기능으로서 정의한 적이 있었다. (...) 푸코는 주체의 의미를 확장하는 동시에 그것에 하나의 환원불가능한 차원을 부여한다.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 주목하는 것은 권력 및 지식의 차원이 아니다. 권력과 지식으로부터 구별되는 새로운 차원을 구성했다는 것에 주목. 

"그러나 자신들 스스로를 지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가?" 동일한 힘을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로 방향을 되돌리는 것이다. -> '자제'에 대한 푸코의 분석. 자기가 자신의 쾌락과 욕망을 지배하는 힘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쾌락과 욕망에 맞서는 것, 그것들에 굴복하지 않는 것, 몰려드는 쾌락과 욕망에 저항하든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들에 사로잡히는 것, 그것들을 극복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에 정복당하는 것 등의 표현"

 

더 이상 권력도 지식도 아닌 이 자기와의 관계, 이 새로운 차원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자기에 의한 자기에의 영향은 쾌락인가 또는 욕망인가? (...) 

그러나 보다 심오한 하나의 실증적인 이유가 있다. (... ) 그것은 주름작용 자체, 재이중화가 하나의 기억memoire이라는 점이다. 기억은 자기와의 관계 또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영향력에 대한 참다운 이름이다. 

 

푸코에게는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의 상호 얽힘, 상호 교차가 존재한다. 이는 옷감 짜기의 플라톤적 모델로서 지향성을 대체한다. 그러나 이 상호 얽힘은 지식-'존재'의 두 형식들이라는 환원 불가능한 두 적수들 사이의 구속이자 전투이다. = 얽힘의 전략

푸코가 루셀에게서,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브리세에게서,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마그리트에게서 발견한 것, 그리고 아마도 그가 자리에게서 발견할 수도 있었던 것은 언표 가능한 것을 정복하는 사물의 분노, 가시적인 것을 정복하는 말들의 소음, 이중의 포획, 청각적이고도 시각적인 전투이다. 푸코에게는 모든 존재론을 변형시키는 이중성/이중체라는 환각적 주제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 모든 전투가 하나의 전략을 함축하고 있으며 모든 체험 또한 권력 관계 안에 포착되어 있다. 이것이 존재의 두 번째 모습이자 지식-'존재'와는 차별성을 갖는 권력-'존재', "권력존재"이다. 이는 형성된 지식의 두 형식들 "사이의" 제반 관계를 복원시키는 비형식적 권력관계들 또는 힘관계들이다.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는 권력. 자기 구성! - 푸코가 미적 실존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자기의 삶을 만들고 구성한다. - 권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차원으로서 독립성을 가진다는 점.

자기 스스로의 논리, 스스로의 인과성 -> 창발emergence/사건 - 자기의 원인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힘들의 관계로서의 권력. 코드로서의 지식. 양자로부터 동시에 벗어나는 새로운 차원을 발명했다. "자기통치"self-government 의 가능성을 정초했음. - 자기통치를 가능케 하는 훈련과 실천들이 '벗어남'에 기인함. 독립된 것으로 돌아가서 정초했다. 스스로 주름을 만들고 구부러지는 가운데 그결과 하나의 '분신'을 창조하고, 존재론적 차원의 자기관계. =자기에 의한 자기 역량. 자기 감응. 그러한 관계를 창출하며, 고유한 차원을 따라 깊어져가고, 전개되는 하나의 안쪽, 내면성을 구축하게 된다. -> 그리스인들의 내면성의 발견

이렇게 발견된 자기관계가 막연히 체득되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 성 문제를 통해 비로소 자기 관계적인 역량이 실현된다. 

 

--> 쾌락의 활용 (성의 역사 2권) - 권력관계가 오직 실현되는 한에서만 드러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관계 역시 오직 실현되는 한에서만 확립될 수 있는데, 그 실현의 장소가 바로 성. 

내면적 개인은 도덕적 지식 안에서 코드화되고 재코드화되며, 무엇보다 권력의 쟁점이 되면서 다이어그램화된다. 이로써 '주체'의 의미가 변화된다. -> 그것은 더이상 주체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예속의 절차에 종속되는 것이다. 주체는 이제 자기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권력-지식이 주조하는 것으로

"코드들과 권력들에 저항하는 자기관계는 언제나 있을 것이다. 주체화 즉 자기관계는, 그리스의 방식이 머나 먼 기억이 되는 지점까지, 변화하고 방식을 바꾸며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들로의 회귀'가 아니라, 주체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우리의 주체화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윤리학은 네가지 측면을 가진다(아리스토텔레스)  ->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

 

1) 주름 안에 포착되어 둘러싸이게 되는 우리 자신의 물리적 부분 -질료인

2) 힘들의 관계의 주름 - 작용인

3) 지식의 주름 혹은 진리의 주름 - 형상인

4) 바깥의 주름 즉, 궁극. - 목적인

_> 따라서 주체성을 향한 투쟁은 차이를 향한 권리, 변이 및 변형을 향한 권리로 나타난다."

우리를 권력의 요구에 따라 개별화하는, 각 개인을 동일성에 묶어두는 예속에 저항하는 것. 

 

 

이제 푸코는 바깥으로부터 오는 요소 즉 힘을 발견한다. 블랑쇼처럼 푸코 역시 '밝힘'보다는 '바깥'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힘은 다름 아닌 바깥의 힘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형식들의 외재성을 "설명하는" 것 또한 바깥이다. 그리고 이는 이 형식들 각각에 대해서든 또는 그것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든 마찬가지이다. 

마치 바깥이 자신과 같은 외연을 갖는 어떤 안쪽을 스스로의 힘만으로 구성해내는 것처럼, 힘 또한 자기가 자기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또 자기로부터 영향을 받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까? 

 

..

힘들은 언제나 '바깥', 즉 어떤 외재성의 형식보다도 더 먼 하나의 특정한 바깥에서 온다. 마찬가지로 힘관계 안에 포착된 특이성들뿐만 아니라, 언제나 이 관계를 변형시키고 그것들을 전복시키며 또 불안정한 다이어그램들을 변화시키려 하는 저항의 특이성들이 존재한다. (...)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고 안쪽의 공간을 추적함으로써 스스로를 재구성하면서도 언제나 바깥의 선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 하나의 송과선과도 같은 것이다. 가장 먼 것은 가장 가까운 것으로 전환됨으로써 내부가 된다. 주름들 안의 삶(la vie dans les plis). 이것이 우리가 그 안에 자기를 들여놓음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비어 있으리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중심의 방이다. 여기, 이 주체화의 지대 안에서 우리는 자기 속도의 주인, 상대적으로 자신의 분자들 및 특이성들의 주인이 된다. 이것은 외부의 내부로서의 작은 배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생산하는 경우에는 여전히 예전의 방식들을 따른다. 주체화의 과정 자체가 기억, 혹은 절대적 기억이다.

기억은 망각과 대립하는 일상적인 기억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망각되어 있으면서 기억되기 위해서 언제나 다시 창조되어야 하는 기억.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체화의 과정은 곧 '기억'인 것!

 

(221쪽) "나는 허구들 이외의 다른 것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허구도 이렇게 많은 진실과 현실을 생산한 적은 없었다. 

cf. 거짓역량

들뢰즈의 영화이론 가운데 '거짓역량'이 있음. - <차이와 반복>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인데, 진리의 이중치라고 이야기해서 참/거짓은 재현의 영역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의미와 가치의 범주로 사태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 의미의 관점에서 봤을 때 거짓처럼 보이는 것들을 지시함. 

의미를 생산하는 사건을 표현하는 말은 '새로운 시대를 정초'한다거나, foundational event은 진/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 체제를 성립시키는 사건 속에서는 말이나 행동이 되는 것은 잣대가 없는 것. 

 

 

(204쪽) "만약 지층들이 딸에 속하는 것이라면, 전략들은 하늘 또는 대양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층 안에서의 현실화는 전략에, 문서고 안에서의 현실화는 다이어그램에, 지층화 작용 자체는 지층화되지 않은 실체에 속해 있다. 현실화는 적분하는 동시에 분화한다. 비형식화된 힘관계들은 특이성의 근방을 지나는 곡선 형식(언표)특이성을 빛의 형상 안에 재배치하는 그림 형식(가시성)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 형식의 창조를 통해 분화한다. - 창조적 분화는 두가지 경로를 통과한다.  잠재성의 영역은 하늘로 그렸음(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생각나게 하기도)


cf. 이들은 모두 상징(표상)을 그것들을 발생시킨 구조에 조회함으로써 왜곡된 상징들을 파괴/교정하는 상징해석학적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이 심적 표상을 무의식적 소망의 위장된 생산물로 파악하고 표상과 욕망의 관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지향한다면,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적 가치들을 소위 '힘에의 의지'의 변형된 생산물로 파악하고 도덕적 표상의 기원을 의지의 차원에서 발견하는 것을 지향한다(Foucault, 1971). - 빛은 사물들을 비춘다. 그러나 이러한 비춤 속에서 비추어지지 않는 유일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물들을 비추는 빛 그 자체이다. 빛에 내재하는 이 비추어지지 않는 부분, 즉 빛의 어둠이 바로 빛의 타자이다(Blanchot, 1969:243-244). 블랑쇼는 이처럼 빛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빛의 타자로 기능하는 비추어지지 않은 영역을 '외부'dehors라 부른다. 여기에서 외부란 바깥(exterieur)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존재하지만 경험적으로 지각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은폐된 차원을 의미한다. (...) 1966년에 제출한 논문 <외부의 사유>에서 푸코는 바로 이러한 블랑쇼적인 의미의 '외부'에 대한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그가 분석하는 것은 '나는 말한다'라는 명제이다. 푸코가 보기에 '나는 말한다'는 명제는 모든 언설의, 모든 문장의, 모든 명제의 앞에 생략된 채 부가된 일종의 그림자와 같은 언표이다(Foucault, 1966a: 546-547). '나는 말한다'라는 명제는 모든 발화행위에 숨어 있는 발화되지 않는 필수 조건을 구성한다. 푸코가 외부의 사유라는 개념에서 외부로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나는 말한다'라는 명제처럼 언어적 행위의 조건을 구성하는 그러나, 언어적 실천 속에서 늘 생략되어 은폐되는 언표행위의 타자를 가리킨다(Foucaut, 1966a:549). 

 

김홍중 (2007). 근대적 성찰성의 풍경과 성찰적 주체의 알레고리. 한국사회학, 41(3), 186-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