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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취향_아를레트 파르주

by jemandniemand 2020. 11. 5.

목차

무수한 흔적들
출입문에 이용 시간 안내문이 붙어 있다
아카이브에 누가 있는가
필사자료 열람실에 왔더니 패스를 보여 달라고 한다
수집 단계
좌초한 문장들
필사자료 목록대장 열람실은 거대한 무덤 같다
해변의 역사가

옮긴이의 글

 

 


아카이브에서 느껴지는 실재감을 묘사하는 데는 이렇듯 서류 뭉치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발견한 헝겊 편지와 노란 씨앗이 좋은 예가 되어준다. 트럼프 카드의 뒷면에 숫자를 휘갈겨 쓰거나 주소를 적어놓은 경우도 있고, 조서의 여백에 낙서를 하거나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써넣은 경우도 있다. 낙서는 서기가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었다는 증거이고, 알아볼 수 없는 글자는 수사관이 깃털 펜을 손에 든 채 자기가 쓴 조서를 다시 읽었다는 증거다. 경악과 싸우고 고통과 싸우고 사기와 싸우는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은밀했던 순간들, 글로 옮겨지는 일이 거의 없었던 순간들, 그런 순가들의 물질적 흔적이 그 사라진 세계와 함께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카이브에는 그런 순간들이 화석처럼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 작업자가 그런 순간들을 읽거나 만지거나 끄집어낼 때면 일단 이것이 실재했으리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작업자가 아카이브에서 읽게 되는 말이나 만지게 되는 물건, 곧 아카이브에 남겨져 있는 흔적은 실재했던 것의 형상이 된다. 먼 과거에 실재했던 것의 증거가 드디어 가까운 이곳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카이브가 엎에 펼쳐지면서 작업자에게 '실재를 만지는' 특권을 안겨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부터 작업자는 자문하게 된다. 이렇게 종이 위에, 아니면 종이 사이에 다 들어 있는데 이미 있는 것에 관해 왜 길게 떠들어야 하지? 왜 굳이 다른 말로 설명해야 하지?

 

자료를 베끼는 작업이 점하는 시간대plage는 둘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어쨌든 정보화 시대에 이렇게 자료를 베끼고 있다니(헉 뜨끔), 작업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작업, 시작하자마자 바보가 되는 것 같은 작업이다. 어쩌면 그러다 정말로 바보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부분을 메모하든지 전체의 요지를 정리하든지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주구장창 그저 베끼고 있다니 분명 바보 같은 면이 있다. 그러고 있는 것이 그저 바보라서일 수도 있고, 바보에 고집쟁이에 잘난 척하는 미치광이라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자료를 한 자 한 자 똑같이 따라 그리는 작업에는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는 느낌, 이것이야말로 자료와 한편이 되면서 동시에 사료와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작업이라는 느낌이 따라온다. 

 

아카이브가 사람의 모든 면모를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카이브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잘려 나와 어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어떤 혐의를 안타깝게 부인하는 모습으로 굳어져 있다.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에도 핀에 꽂힌 채 날개를 파닥거리는 나비 같은 데가 있다. 진술은 어설프면서 소극적이고, 침착한 겉모습 뒤에 어린아이 같은 공포를 감추고 있다. 예외라면 교활한 궤변가들, 파렴치한 사기꾼들이다. 

 

아카이브는 여성 관련 정보들을 통해 여성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성이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까지 보여준다. 아카이브 적분에 작업자는 여성을 별도의 연구대상으로 설정한 뒤 여성의 풍속을 진역, 전시하는 단계를 벗어나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특별한 방식, 곧 여성이 남성적 세계에 가담하는 특별한 방식에 주목하는 작업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평범한 여성들, 비슷비슷한 여성들, 예외적인 여성들이 여러 장면 속에서 가시화된다. 젖먹이 아이를 실어 가는 센 강 부두를 떠나지 못하는 여자들이 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위험을 불사한다는 점에서는 갓난아이를 성당 포석 위에 몰래 놓고 가는 여자들과 비슷하다. (...) 본인의 힘을 알고 있는 여성이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 또는 가정을 위해서 그 힘을 이용해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들을 연출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의 여성은 진지하고 확고하고 정치 감각이 있다. 반면에 여성이 비교적 사적인 상황에서 농락의 대상이 되는 모습으로 비가시화되는 경우도 있다. 폭력과 예속에 시달리는 것은 실제로 여성의 일상을 구성하는 측면들이다. (...)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는 목격자들과 용의자들의 여러 진술에서도 여성은 불행의 얼굴, 파괴의 얼굴, 무시무시한 죽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카이브는 단순한 곳이 아닌 만큼, 작업자는 아카이브를 서로 모순되는 여러 방식으로 읽게 된다. (...) 작업 안에 어떤 '실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작업이 이렇듯 다원적으로 행해진다는 사실 그 자체에 존재한다. 

 

작업자는 아카이브에서 보고 들은 말과 행동의 디테일들을 가지고 의미 성좌를 만들어내지만, 같은 사건을 다루는 다른 자료, 또는 아예 다른 사건을 다루는 자료에서는 다른 디테일들이 애초의 디테일들을 심문하면서 다른 의미 성좌를 만들어낸다. 

아카이브는 담론에 가려져 있던 것들을 엿볼 수 있는 곳, 규범적인 행동이나 정형화된 행동이 파기되면서 다양한 행동들, 의외의 행동들, 그야말로 틀을 벗어나는 행동들이 출현하는 곳인 만큼, 아카이브 작업자는 지배와 억압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개념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아카이브 취향은 이런 마주침 속에서 만들어진다. 아스라하거나 선명한 실루엣들과의 마주침, 언어의 조명을 받는 일이 거의 없는 매력적 그림자들과의 마주침, 적대하면서 동시에 적대당하는 존재들과의 마주침,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시에 자기 시대라는 폭력에 훼손당하는 사람들과의 마주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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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역사를 지지한다는 것", 여러 역사를 아우를 수 있는 한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의 역사적/사회적 소여를 이용해 능동적 주체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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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사건에 관심이 있으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양상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관심의 동력이 그저 아카이브의 사건 자료 그 자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사건에 대한 관심은 실은 지난날과 함께 오늘날을 읽어내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저마다 규범을 넘나들 수 있는 수많은 전략들, 규범을 어지기 않을 수 있는 복잡한 노선들을 마련하는 것은 당하고 견디는 삶이 아닌 모색하는 삶, 연대하고 대결하는 삶을 살기 위함이다. 세계에 전망이 있다면, 현실에 존재론이 있다면, 아무것도 물화시키지 않겠다는 그 강경한 의지 속에 있을 것이다.          

 

 

아카이브는 이론적, 추상적으로 구축된 인식 앞에 작은 존재들과 사건들의 무게를 들이댐으로써 전통적 지식이 사소하면서도 자명한 '실재'의 구멍을 내기도 하고, 사람들이 짓는 표정과 사람들이 겪는 고통, 고통받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그런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권력을 인식하게 해주기도 한다(당대 사회의 전체 구조를 설명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갔을 때 반드시 필요한 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