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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안네마리 몰, The Body Multiple

by jemandniemand 2021. 3. 23.

 

 

 

 

 

이 책은 (서구화된) 의학이 신체와 질병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탐구하는 책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개체를 규명하고 밝혀내는 대신, 치료를 둘러싼 각양각색의 다양한 관행(의학이 실제 그러한 개체에 적응하고, 상호작용하고, 개체의 형태를 조형시키는 방법)들을 탐구한다. 기술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이는 의학이 그것의 관심사와 치료의 대상을 어떻게 제정(enact)하는가에 관한 책이다.

따라서, 의학이나 치료술에 관한 여타 저서들과는 달리, 이 책은 몸과 질병이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곧 이 책이 일련의 다른 실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실천들은 하나의 개체가 절단되고, 채색되고, 조사당하고, 발화되고, 측정되며, 수치화되고, 나아가 병을 예방하려는 행위들을 포함한다. 여기서 개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고정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지식보다는 제정(enactment)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 실천들은 우리가 기왕에 하나의 대상이라 규정해온 것을 하나 이상의 것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끈다. 이 책의 모든 사례들은 동맥경화와 관련이 있다. 동맥경화증을 앓는 동맥의 퇴적층은 동맹경화증 환자가 상담실에서 이야기하는 동맥경화증의 문제와는 별개의 개체이다. 이 둘이 비록 (동맥경화증이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협착증에 대한 혈압의 손실은 방사선 전문의들이 엑스레이 사진에 보이는 혈관 루멘의 손실과 동일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움직임은 인식론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인식론은 대상화를 촉진하는 언어와 연관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표현의 정확도를 묻는다. 그러나 사물이 실제로 제정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제정은 복수형으로 나오기 때문에 중요하게 제기되야 할 것은 그것들이 어떻게 조정되느냐(coordinated)에 관한 질문이다. 실질적으로 신체와 질병은 하나 이상이지만, 이는 이들이 여러 독립체로 쪼개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궁극에 탐색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실천들의 복합성이다. 나는 이와 같은 관점을 이 책의 제목(The Body Multiple)에서 포착해내고자 했고, 여기서도 하나의 명사는 여러 개의 형용사로 바뀌어 나타난다. 한마디로, 이 책은 "몸의 다중화"라는, 복잡하게 얽힌 무리(crowd) 에 관한 책인 것이다. 

 텍스트의 전반적인 어조는 논쟁보다는 성찰에 가깝다. 나는 전체로서의 의학 - 그런 것이 실제 존재하는지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 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의학의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나는 의학 내에서 발생하는 차이들을 적절히 드러내기 위해 좀더 친밀한 방식의 규범을 설정하는 일에 참여하고자 한다. 만약 의학적 실천의 대상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한/제정되는 것이라면, 진실함(truthfulness)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몸의 다중화와 그것의 질병들이 제정되는 다양한 양식들의 타당성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이에 관한 질문들을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제시된 다양한 제정의 적절성이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혹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파고들지 않는다. 대신 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자 한다. 이 이론틀은 (질병으로서의) 문제가 틀지워지고, 몸이 형태가 되고, 생명(/삶)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조형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는 의학의 존재론적 정치학(ontological politics)에 관한 것이다. 

 이론적 단초를 제공하기 위한 나의 관심은 곧장 이 책을 하나의 철학서로 둔갑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끌어들이고 있는 철학은 그것의 로컬(local)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꽤나 구체적이다. 그러므로, 책의 전반에 걸쳐 제시되는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느 병원과 부분적으로는 그것의 주변 환경에서 행해지는 단일하면서도 다원화된 질병에 관한 스냅샷 형태의 이야기들이다. 그 질병이란 동맥경화증에 해당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하반신 동맥경화증이다. 병원은 내가 앞으로 병원 Z라는 익명으로 부르게 될, 네덜란드의 중소도시에 자리잡은 종합 대학병원이다. 이처럼 안정된 장소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철학'의 추상성으로부터, 즉 보편주의적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목표이지만, 그럼에도 이론화 작업은 대상과 관련된 지역성을 다소간 감추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하려는 것은 보편주의와 대별되는 것으로서 지역주의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태와 용어, 그리고 목적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변화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능한 한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이다.

 의료 인류학과 의료 사회학은 풍부한 학문적 궤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방대한 조사 과정을 나의 철학적 작업에 통합시키는 과정이 수행되어야 했다. 이 책은 지식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접근일 뿐만 아니라, 기왕의 사회과학 연구들이 몸과 그것의 질병들을 연구해온 방식에 관한 논의를 다룬다. 오랫동안 사회과학자들은 의사들이 다루는 신체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해석적 실재를 연구해왔다. 이들은 질환(disease)과 질환(illness)의 차이를 규명하고자 했으며, 특히 후자를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아왔다. 최근에 이르러 비로소 이들의 연구에 '질병'에 대한 의학적 관점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한 시도 중 하나이며, 실재의 제정(enactment)에 대한 연구가 곧 몸의 다원화와 그 모든 육체성(fleshiness)에 스며들어 있는 질병들을 인류학적으로 탐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책을 구성하는 이 수백장의 페이지들은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답하기 위한 스케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