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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_김원_현실문화_2011

by jemandniemand 2021. 3. 23.

목차

발문
감사의 말

프롤로그 유령을 찾아가는 길

제1부 박정희 시대와 서발턴들

1. 박정희 시대의 역사서사
2. 왜 서발턴인가?
3. 박정희 시대 서발턴의 역사들

제2부 타자의 기억
1 두 이주여성 이야기: 바독 간호사의 이주노동에 대한 기억
2. 죽음의 기억, 망각의 검은 땅: 광부들의 과거와 현재
3. 박현채, 소년 빨치산과 노예의 언어

제3부 서발턴과 사건
1. 황량한 '광주'에서 정치를 상상하다: 광주대단지 사건
2. 훼손된 영웅과 폭력의 증언: 무등산 타잔 사건
3. 소년원을 탈출한 아이들: 비정상인에 대한 시선
4. 1979년 가을, 부마를 뒤덮은 유령들

제4부 정치
1. 한국 사회는 서발턴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는가?
2. 사건으로서 정치와 차이의 공간

에필로그 박정희 시대, 서발턴 그리고 유령들의 역사

부록
주석
참고문헌

 


프롤로그 유령을 찾아가는 길

 

스크린 속 여성들을 따라가는 것은 타자화된 이성의 '외부세계'를 탐사하는 여행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스크린과 브라운관 속 유령들의 목소리는, '나를 잊지 말아요'란 망각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조국 근대화를 국가의 지상 과제로 내세웠던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진 이질적인 요소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제거하고자 했다.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전통적인 집을 파괴했고, 4.19 시절 거리를 활보했던 소년들을 우범소년으로, 그리고 동네 무당들을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어 공동체로부터 추방했다. 비록 이들은 추방되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비정상적인 복수와 욕망 그리고 성애를 상징했던 천년호, 무당, 괴물, 귀신으로 가득 찬 공포영화들은 여전히 극장을 밝혔다. 이들은 실제와 환상 사이의 경계, 문지방(liminal) 공간인 영화에서 다시 출현했다. 박정희 시기 현실 속의 서발턴도 당시 공포영화에 등장했던 유령들과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이고 말할 수 없는 존재로 한국 사회를 배회했다. (22)

 

서발턴은 저항서사인 민중사의 주인공도 아니었으며, 연구자의 시야 안에도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었다. 전확히 말해서 민중사가 '혁명적-이성적 민중'이란 이름으로 통합하려던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민중사에 포함시키기엔 부적절한 '민중답지 못한 존재'였다. 

 

여기서 '글을 어떻게 쓰는가'를 자문할 필요가 있다. 흔히 글은 문제 제기, 기존 연구 검토, 방법론 등 '다른 학자의 견해'를 선행 연구 검토라는 이름으로 참조한다. 여기서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는 본문에서 글의 위치를 잡아주는 장치이다. 하지만 푸코의 작업을 참조해 보면, 그의 글 속에 중요한 선행연구들이 빠져 있다. 다만 동화, 희극, 소설, 조서, 판결문, 임상치료 기록 등 1차 자료만이 포함되어 있다. 그에게 이들 자료는 인간학의 맥락에서 구성된 자료들이었다. 푸코에게 근대 공간이란 비정상인을 훈육하는 지식과 연결된, 바로 공간-지식-기록이 연계된 곳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에 선행하는 것으로서의 개념이나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닌, 사전에 미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 방법이었다. (28)

 

세계화와 국제화가 외쳐진 지 1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에게 세계화는 '영어 능력'으로 등치되어 이해되기 일쑤이고, 이런 경향은 대학 사회에서 더욱 심하다. 나는 연구자가 연구를 위해 영어와 다른 외국어를 익히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연구들 가운데 영어로 된 저작물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의 연구를 주체적으로 소화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영어를 대학 연구교원 임용의 제1기준으로 삼는 것은 어처구니 없음을 떠나, 식민주의적인 발상과 다르지 않다. 연구는 쓰인 언어가 무엇이든 그 자체로 평가받고 이를 통해 연구자의 자질이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구내용에 앞서 '영어라는 언어'에 의해 쓰인 연구 - 속칭 SCI(Science Citation Index) - 가 한국어로 쓰인 연구보다 3배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32)

 한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이중적 잣대가 여전히 대학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잣대 가운데 하나는 '편 가르기'이고, 다른 하나는 '논문의 숫자'로 연구자를 평가하는 것이다. (33)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침묵을 강요당했던, 언급되는 것조차 위험스러웠던 주체들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방법과 시각의 문제가 나에게 무겁게 다가왔다. 

더불어 국가라는 경계 내에 포함되지 못하는 비가시적 집단이 연구대상에서 배제되듯이, 지배적 관념이나 패러다임에 속하지 못하는,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는 학문공동체라는 '제도'에 안착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이것이 서발턴과 경계에 선 연구자가 공유하는 비가시성과 경계성이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37)

 

시간이 갈수록 나의 연구가 '언어를 지니지 못한 집단'이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 관심은 민족공동체 내에서 지식인이나 민주화운동에 의해 그 어떤 이름으로도 명명되지 않은 서발턴의 '우발적 사건', 이들이 몸으로 말하는 시공간에 관한 문제였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들을 재현하는 문제는, 사료의 문제라기보다 인식론의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41)

 

근대화, 합리화, 질서 그리고 반공문명인 등은 1970년대를 지배하던 지식체계였다. 또한 서양풍 저질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사회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박흥숙을 폭력을 숭배하는, 이소룡과 같은 '국적조차 불분명한 대중문화'에 물든 비정상인으로 만들었다. (45)

 

이상에서 본 것처럼 다소 울퉁불퉁했던 길을 따라오면서 나의 시야에 서발턴이란 문제 틀이 들어오게 된 배경을 좀 더 체계화시켜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아래로부터 역사 혹은 민중사의 탈식민화라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두번째, 조금이라도 한계를 넘어서면 흔들리는 계급과 민중 개념의 '불충분함'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세번째, 그간 역사학과 사회과학에서 보편적인 동시에 기원적이라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지식체계를 문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1부 박정희 시대와 서발턴들

 

한국에서 서발턴 수용이 지닌 문제점

1) '실증적 복원' 등의 실증주의 및 본질주의라는 한계

2) 서발턴의 존재와 다양한 목소리를 '재현할 방법론'이 부재하다. 서발턴이 지배 담론 간의 경계와 차이의 공간에서 재현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 서술에서 주변화되어온 존재, 도망자, 전향자, 비겁자, 탈출자 등을 역사 서술의 중심으로 가져옴으로써, 기존 역사 서술의 개념과 공간에서 설명되기 어려운 '잔여의 공간'을 드러내야 하는 것

3) 근대 역사학 비판과 지식체계 검토를 둘러싼 핵심 문제에 관한 논의가 한국에서 여전히 초보적이며, 근대/서구/보편의 비판적인 극복을 둘러싼 문제가 방법론과 인식론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

 

냉전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 간에 총력전은 그 밑에 사는 대중들의 마음, 정신, 도덕 그리고 습속을 둘러싸고 다차원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민국가라는 상상적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동시에, 이에 귀속된 삶인 '국민'만이 제대로 된 삶이라는 공포가 내재했음. 

냉전시기 국민국가와 민족주의(그리고 그 질서)가 지니는 억압성

 

 

베트남 파병 병사

역설적인 사실은 이들이 냉전 시기 파병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와 함께 여전히 가난과 소외를 겪고 있지만 이들에게서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사병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감추어진 트라우마'인 경우가 많았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파독 노동자

독일 사회에서 이방인이자 마이너리티로서 이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차별, 인종주의, 막장에서 사고로 죽어간 동료들에 대한 기억은 '어쩔 수 없었던 에피소드'로 여겨지고 있다. 

열악한 노동환경 - 또한 집주인인 독일인은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툭하면  경찰을 부를 것이라고 협박하기 일쑤였다. - 자신의 고유번호로 지위를 확인받았다. 

 

기지촌 여성

"[무당이 말하길] 내가(구술자 지칭) 있으면 아들 죽는다 하더래요. 그니까 '나가라' 하더라구. 이제 뭐[내가 있으면 남편이] 죽어서 돌아오고 내가 집을 나가믄 아들이 살아 돌아온다."

1971년 5월 미군의 부당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조치에 항의해서 "우리가 신발짝이냐"며 항의한 기지촌 여성들의 집단행동은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의심을 샀다. 

기지촌 여성들은 가족과 민족 구성원으로부터 배제되고 미군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면서, 미군에 의한 살해, 약물 과다 복용, 자살 등으로 삶을 마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엉터리로 살은 거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말도 잘 못하죠, 어설프죠. 또 그냥 영어도 못하죠. 그러니까 엉터리로 살은 거예요".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과 1979년 부마항쟁

 

도시하층민

냉전 시기 근대화와 도시화는 도시하층민에 대한 폭력의 구조였으며, 도시하층민은 '더러운 청결 대상'에 불과했다. 

 

 

 

어떻게 만났는가? 부분적 일화들 - 이론의 재확인.. 

한계 극복방법은?

 


제2부 타자의 기억

 

구술사와 기억 연구는 개인과 사회, 주체와 세계 등에 기초한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하는 연구 방법이다. 또한 구술사는 합리적이며 규범적인 특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위의 특성을 연구 영역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기존의 원인-결과론적 설명 모델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개인의 기억에 기초한 연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방법론, 인식론 그리고 실천적인 논의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119)

 

'파독' '간호사'. 이 두 단어는 내게 아주 낯선 어감으로 다가오는 말들이었다.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 독일은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유태인 집단학살, 한국과 유사한 분단국가, 동베를린 사건 그리고 독일 통일 때 티브이에서 본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기억이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 와중에 파독 간호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119)

 

 

두 여성 모두 연구자인 나와 과거에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두 여성 모두 나의 구술면접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고,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박한뫔은 1948년 충남 부여 양암면에서 5남 2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10리, 20리씩 걸어 다니면서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덕분에 국립중앙의료원에서 1년동안 공부한 뒤, 부여 보건소에서 결핵 요원으로 2년 동안 일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에 독일에 간호사로 파견되었던 박한뫔은 1979년까지 9년 동안 독일 베를린 시립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당시 파독 간호사는 3교대 근무를 해야겠고, 월급이 다른 직업에 비해서 많은 편은 아니었다. 독일인 간호사들이 야간 근무를 기피했으므로 이는 주로 한국인 간호사들의 몫이었다. 박한뫔도 야간 학교를 다니면서도 밤 근무를 하고 낮에는 몇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잠 부족을 가장 힘들어 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독일인들이 고마워하는 간호사라는 직업이 제일 좋은 직업이라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대학이나 상급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을 보며 콤플렉스를 느끼기도 했다. 

파독을 준비했던 여성들의 기억에서 자주 등장..

당시 신촌 이화여자대학교 주변에 해외개발공사가 있어서 독일어 교본을 가지고 시내버스를 타면, 누가 '이대 독문과에 다니느냐'고 물을까봐 조마조마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61)

제 별명이 클라이네 비네(kleine biene), 비네는 꿀벌이거든요. 클라이네는 조그만 것. 꼬마 꿀벌이죠.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원장님이 "클라이네 비네 어디 있냐"고 저를 찾으셨겠어요. 

- 신길순

 

두 여성은 힘든 서비스 육체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고, 한국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은 그녀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준 땅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한뫔에게 독일은 자신이 안 모든 것을 가르쳐준 땅이 있으며, 신길순에게도 독일은 평생을 안고 간, 독일어를 가르쳐준 동시에 자신을 인정해준 곳 그래서 아직도 토요일마다 집 안에서 독일 음악 틀어놓고 빵을 먹으며 향수를 느끼는 곳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고향은 두 군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독일에서 차별을 받았던 기억이 없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지만 '절대 차별대우는 안 받았어요' '감사하다' 대우받았다' '혜택받았다'는 것이 두 여성의 반복되는 기억들이다. 

-- 신길순이 화가 났던 이유는 시체 닦기로 상징되는 천한 일로 파독 간호사들이 했던 일을 비하시켰기 때문이었다. 

 

한국사람들은 다 간첩이다

사회운동의 가부장성

통일이나 민주화 등 거대 담론 속에서 여성-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남성 사회운동가들의 태도

 

두 여성의 구술로 미루어 볼 때, 가난과 장녀로서 가족에 대한 부담감에 억눌려있던 여성들에게 독일행은 하나의 기회로 기억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과연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를 둘러싼 문제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이들의 '다른 이야기'를 한국 사회가 '과연 듣고 싶어하는가'를 둘러싼 문제가 더욱 핵심적이었다.

 

나는 박정희 시기 광부들의 역사적 리얼리티 복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광부들의 과거를 반영하되 그것이 현재화되어 재현된 '현재화된 기억'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광부들을 전형화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들이 자신의 체험과 기억을 현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즉 '자기이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176)


제3부 서발턴과 사건

 


제4부 정치

 


에필로그 박정희 시대, 서발턴 그리고 유령들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