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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니에게서 배운 것_키스 하트, 크리스 한_2009

by jemandniemand 2021. 4. 1.

 

 

 

 로컬-정치(질서) vs 외계-시장(무질서) 로컬-정치 --- 외계-시장 

아리스토텔레스

애덤 스미스

 

통제/제한, 경계선 긋기(국경), 국가, 친족, 공동체                              -                                  자율/방임, 세계화(무국경), 교환 및 이동, 개인

 

 

 

마르크스조차 복잡한 경제 체제의 경우에서라면 화폐의 출현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음을 인지했으며, 어떤 형태로든 국가나 체제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후계자/추종자들은 화폐가 주변화된 채 농경 사회에 기대는 전근대적 시민주의 및 기존의 곤고하고 통제된 국가 형태로 돌아갈 것을 선호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토착(로컬) 정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 주장은 국가로 하여금 시장의 무질서를 통제하고 규범을 만들어 개인의 행동을 제어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화된 경제> 규범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지속적이고 유효한 사회적 간섭을 정당화한다. 

 - 1930년대 시장 붕괴 이후, 케인즈주의로 입장 곤고화. 

 

폴라니는 특히 시장과 이에 결부된 물물교환의 원칙이 호혜성(reciprocity), 재분배(redistribution), 그리고 가구(householding) 와 공존하며, 이 세가지 요소가 "경제적 행동을 뒷받침하는 기본원칙"이 됨을 강조한다. 

 

 

고전경제학자들의 주장..

(1) 기술의 발전과 혁신 - "산업혁명"

(2) 산업 경영의 고도화

(3) 전세계적으로 유통되는 화폐의 상승세로 인한 "사회"의 축소

---> 화폐경제의 확산은 불가피하다 -> "자유시장으로 인한 불평등의 확산도 불가피하다"

 

 

마르크스&엥겔스는 사적 재산의 권력 ("자본")이 상품의 기계적 생산에 기반을 둔 도시 문명의 사회를 조직하기에는 너무나 분열/빈틈이 많음을 강조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노동자들의 강제 동원이 진정으로 집단화된 치료책으로 향하도록 하는 개선된 사회적 잠재성에 집중하고자 했다.

베버는 기존의 자본주의적 관료제의 합리주의가 많은 이들의 삶의 질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또한 자유주의자로서 시장에 대한 정부/국가의 간섭은 오히려 시장에서의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라 간주했다. 

뒤르켐 및 모스 둘 모두 시장과 화폐에 대한 사회적 역할의 확대를 수반하는 인간의 상호의존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사회학자들이었다. 

"적자생존"에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그렇다면 폴라니의 입장은? 

<거대한 전환>

19세기는 평화와 부귀의 시대였음. 적어도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서는. 

이 풍요는 자기조정 시장(고정된 금리, 자유주의적 정부, 권력배분의 균형)에 기대고 있었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선을 탄 폴라니는 규율!의 존재 여부에 따라 조직의 흥망이 결정된다고 판단, 이 규율은 인구조절, 호혜성, 재분배의 조화에 기대는 것이었음.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것은 시장이 주변적인 역할로 제한될 필요가 있다는 것

"상품화의 환상"이라 일컬은 것에서 폴라니는 자연이 토지(재산)이 되고, 사회가 화폐가 되고, 인류가 노동으로 전환되는 국면에 관해 규명하는 작업을 수행했고, (....)

현재의 일시적 균형은 가까운 미래에 모두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했음. 

- 실제로 권력의 균형은 곧바로 깨졌으며(1차 대전을 통해), 시장 경제는 모두 황폐화되었다. 

 

사실상 폴라니의 입장은 (표면적으로 볼때) 꽤 단순하다. 그는 19세기의 시장 경제 사회의 출현을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라 간주했음. -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에 반하는 것임("사회는 국가의 이익에 종사하는 고학력 관료제 엘리트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또한 날뛰는 시장을 규제할 수 있는 장치는 공동체적/길드적(guilded) 사회주의에 있다고 판단

시장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사회주의 시스템 ~ 뒤르켐과 모스의 입장과 유사

- 복지국가 체제에 긍정

 

방법의 면에 있어서  한가지는 "경제"를 규정하는 것들의 인플레를 두 가지로 일축하는 것이었음

경제란

- 물질적 욕구를 조정하는 것

-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이는 궁극에는

원시 사회에는 "경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근대 이후부터 비로소 "경제"사회가 도래했다는 이분화된 전제에 도전하는 것이었음

 

 

현재의 시간대에서 폴라니를 다시 생각하기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유사한 점이 있음

현재의 자유경제체제는 백래쉬에 임박했음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틈새와 균열이 발견되는 상황.

- 폴라니의 접근은 경제인류학적 관점과 매우 유사함

 

지금의 시장경제는 개인의 소비 패턴을 예측하고, 계산하고, 이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음.

그러나 개인들은 자신들의 소비 방식에 크게 의식적인/성찰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음. 

- 경제인류학이 목표로 하는 바는 개인들의 그러한 교환 방식과 행위,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파급효과를 규명하는 것임. 이것이 경제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 한마디로 거대 체제보다는 미시 행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경제활동의 경향을 분석하고 - 그것이 지금의 시장경제를 구성하게 된 경위를 규명함으로써 지배적 담론의 정설들이 지닌 허점을 규명해내기. 

 

 

공통의 질문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 문제를 합리적인 토대 위에 놓으려는 경제학자들의 열망은 인류학자들의 참여에 걸맞은 의제인가, 아니면 단지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경제학은 서구 문명과 특히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주장은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가? 자본주의가 최근의 기원에 대한 경제적 구성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과 돈은 인간의 보편적 존재인가? 시장이 더 효과적으로 민주화되고 대자본에 대한 불평등한 권한이 어떻게든 무력화될 수 있을까? 사익과 공익이 경제조직에서 조정될 수 있는가, 아니면 호모 이코노미우스의 개인주의가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인가? 경제는 연구의 대상으로서 격리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경제 관계가 사회와 문화 전반에 어떻게 내재되어 있는지를 강조하는 것이 더 나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