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이론에서는 혁명, 현실에서는 민주당?
어떤 유행들
바깥의 정치
좌파 메시아주의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지난 199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 국내에 크게 유행하고 있는 현대 사상의 국내 수용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
말하자면,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대표자들이 국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제는, 가장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을 과시하고, 전복적이며 때로는 파괴적이기까지 한 주장을 서슴없이 제시하는 이 사상가들에 대해 이른바 '운동권' 좌파나 아니면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급진적인 인문사회과학자들이 거의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대신 이 사상가들은 넓은 의미의 교양 대중을 포함하여 주로 문학이나 영화 및 기타 대중예술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연구되기보다는) 수용되고 인용되고 있다.
왜? 이처럼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정치를 제창하는 이들이 어떻게 좌파들에게는 거의 반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이나 대중에게 호응을 받는 것일까?
1987년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곧 군사 독재라는 명시적인 적대자가 사라지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을 분석하고 실천을 조직하기 위한 이론적 중심으로서의 권위를 급격히 상실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담론은 급진적인 사회 변혁의 전망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자유 민주주의의 제도화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또는 '무겁고 심각한' 정치에서 '가볍고 재미있는' 문화로의 이동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과 같은 것이었지만, 이러한 상징은 동시에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잠재력은 거세된 가운데, 포스트 담론은 한편으로 이제 얼마간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학계의 신참자로서 등재지 논문들을 위한 새로운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교양을 과시하기 위한 지적 클리셰로서 저널리즘과 대중 담론에서 애호되고 있다.
푸코, 랑시에르, 라캉, 네그리 하트 등 - 의 입장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마르크스주의가 자유민주주의 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과 기만성에 대한 비판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 2) 경제적 착취에 근거를 둔 계급투쟁을 진정한 정치의 쟁점으로 파악한다는 점. //
동시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특히 푸코(와 알튀세르)의 유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푸코는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의 기저 내지 바깥에 있는 역사적 전개 과정을 탐색하려고 했다. 특히 권력관계의 전개 과정. 2) 푸코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예속화와 주체화라는 문제를 진정한 정치의 쟁점으로 제기한다. 예속화의 메커니즘을 경제적 착취관계나 상품관계에서 찾지 않고 대신 규율권력이나 통치성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권력에 대한 새로운 관점. 주체화에 대한 독자적인 문제설정.
지젝(신적 폭력[1]), 바디우(대상 없는 주체), 아감벤(목없는 이들의 몫[3]) - 메시아주의적 관점을 표방. 이들은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의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단절을 주앙할 뿐만 아니라, 정치신학 전통에 대한 재독해에 기반하여 혁명적 사건성의 관점에서 해명하려고 한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 자본의 시간성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 같은 질문이 메시아주의 정치를 불러온 핵심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보편적인 해방 계급, 곧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주체성에 대한 믿음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단절과 새로운 시작의 사건을 사유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항상 혁명과 봉기, 사건, 단절을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외치며 메시아적 시간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변적인 차원에서의 성찰이고 호소이기 때문이다.
포스트 담론의 수입과 동시에 이루어진 현상으로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라는 현상이 제기된다.
한 가지 사례를 든다면, 들뢰즈, 데리다, 푸코, 라캉, 리오타르 등과 같은 여러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한국에서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포스트 모더니스트들'로, '포스트 구조주의자들'로 지칭되는 현상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경향은 인문학을 고립화하는 효과를 수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이 다른 학문 분과, 특히 사회과학들과의 연계를 점점 더 상실해가고 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적 인문학을 자처하는 경우에도 사회적 실천, 특히 조직적인 실천과의 연계를 맺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이제 그들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내세우면서 등장하고 있는 포스트-포스트 담론들이 포스트 담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어떻게 이 사상가들을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신자유주의적인 기표에서 떼어낼 수 있을지, 어떻게 그들을 조금 더 위험하고 급진적인 사유의 모험 속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1] 과연 어떤 것이 해방적 테러 내지 신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젝은 몇 가지 사례를 든다. 1792~1794년 자코뱅의 혁명적 폭력이나 파리 코뮌 당시의 폭력, 또는 "10여 년 전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들이 도시의 부자 동네로 몰려가 슈퍼마켓을 약탈하고 불태웠을 때 이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반면 2005년 프랑스 방리유에서 소외된 이민자 계층이 벌였던 시위와 폭력은 신적 폭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1968년 5월 혁명과 비교해보았을 때, "시위하는 군중에게 긍정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전망이 전혀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특별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꼭 집어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원한에 근거하여 자기들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또한 중국의 문화대혁명도 신적 폭력이라고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문화대혁명의 "최종결과가 현재 중국에서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되는 자본주의화라는 사실은 일종의 자업자득이다. 마오쩌둥이 주장했던 항구적인 자기-혁명, 경화된 국가, 구조에 대한 항구적 투쟁과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동성이라는 특징 사이에는 깊은 구조적 상동성이 존재한다."... 그 신적 성격을 보증해주는 대타자는 없으며, 그것을 신적 폭력으로 읽고 떠맡는 위험은 순전히 주체의 몫이다.
...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바로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2] "메시아적 시간은 시간의 끝이 아니라, 끝의 시간이다. 사도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최후의 날, 시간이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수축하고 끝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다면, 시간과 그 끝 사이에 남아 있는 시간이다." ... "계급 없는 사회란 계급적 차이의 모든 기억을 폐지하고 잃어버린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사용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장치들을 비활성화해 그 차이 자체를 순수한 수단으로 변형하는 법을 배운 사회이다."(아감벤, '세속화 예찬', 126쪽)
"오늘날 헐리우드의 '사회비평적인' 음모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반자본주의적'이게 되었을 때, '반자본주의'라는 기표는 자신의 전복적 독침을 상실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토론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반자본주의'의 자명한 대립물, 곧 정직한 미국인들의 민주주의적 실체가 음모를 분쇄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의 중핵이며, 그것의 진정한 주인 기표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Zizeck, 200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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