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B-CUz6buV0&t=4078s
포스트모던 사회의, 정치의 심리화 과정. 일상생활의 미학화
언어와 관련된 문제, 감각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 미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
경제의 문화화. 문화의 경제화. 노동이 심리화되었다는 거에요.
취향의 사회. 미학적 사회.
우리는 여기서 역설적인 현상을 봐요. 진짜로 문학이 문학화되었구나. 문학이 진짜 미학화되었구나. 하나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고 있는 행위의 목록 가운데 이제 문학 서적 읽기라는 행위가 변화되었구나. 완벽하게 취미를 구성하는 행위가 된거에요.
1970년대 이후. 앤디워홀 이후.
우리가 얼마나 간지나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방 속에 들어있는 대표적인 소지품을 보여주는거에요. 말그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취미와 사물의 목록을 통해서 그의 인격체나 아이덴티티를 대신하기 위한 독특한 형태의 서사, 내러티브가 있는거죠.
어떤 것을 소비하는 것을 통해 그 행위를 보는 것처럼.
"아니 당신이 하드보일드를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챈들러의 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지! 당신의 컬렉션 속에서 이게 없다면 당신이 그것을 사랑한다고 볼수가 없어! 라는 거죠. 우리는 그렇게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고, 시를 읽을거에요. 그렇게 음악/문학 시장이 날로 번성할 거에요."
따라서 90년대에 문예창작과가 만들어지고 번성하게 된 이유는 당연한거죠. 방금 이야기했던 대로라면, 우리가 미적이고 예술적인 것이라고 하는 주의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정치적인 것에 관련된 사상들을 각색하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들이 곧 소위 진보주의자였다는 거죠. 이런 종류의 문제들로부터 예술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면 예술의 존재론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질문이 제기되겠죠. 미적인 것이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
첫째, 예술적인 것의 자율성을 타도하자는 주장이 있어요(제1차 아방가르드). 정치는 항상 일상적이고 거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건, 여당/야당을 선택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거에요. 정치vs예술은 소멸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는거에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바우하우스 등과 같은 것) 예술과 삶의 차이/격차/분리를 없애야 한다는 것. 그런 것은 우선 완벽하게 실현되었어요. 그런 점에서 1차 아방가르드의 시도는 부서졌다고 볼 수 있어요.
둘째, 아방가르드와 키치의 차이와는 완전히 다른 정서의 차이를 만들어내자는 주장(제2차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인가 키치인가?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것이 루이비통이에요. 이또한 완전히 실현된거죠. 모더니즘으로 대표되고 있는, 일상적인 언어와는 전혀 다른 성격, 언어로서의 언어.
이 맥락에서 니꼴라 부리오('관계의 미학')가 등장합니다.
혁명이라는 유토피아적인 전망으로부터 벗어나자.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만들어내는가? 지금 이후의 세계라는 것은 없다!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예술의 재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어요. 새로운 사회성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거에요. anti-modern이 아니라, alter-modern이라고. 그들(니꼴라 부리요로 대표되는 관계의 미학 파)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계는 대안적인 사회 관계라는 겁니다. 적어도 지금 '공공예술' 이라고 불리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종류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 것이냐를 고민합니다. 혁명이 아니라 '공공성'을 봐야 한다는 거에요. 유토피아가 아닌 '장소 특정적 예술'. 특정한 종류의 독자를 상정하고, 보편적인 문학/예술/등이 아닌, 장소특정적 예술. micro-utopia를 추구, 제도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생산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궁극에 최근의 대부분의 논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자율적이지 않다는 것. 정치가 사회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권력은 바로 이 사회 이 장소 이 관계 안에서 미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주의의 폐지.
한편, 정치는 자율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어요. 급진적인 이론가(알랭 바디우, 조르주 아감벤, 등의 포스트 맑스주의). 환원불가능한 것이 있어. 사회적인 관계를 바꾼다 한들 바뀌지 않는 것이 있어요. 이 관계를 정의하고 설정하고 정립하는 것 자체가 정치라는 거에요. 정치적인 것과 정치는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는 폐쇄적인 유기적 전체 속에 살고 있고, 부분들과 전체의 세계만 알고 있는 것이 정치의 세계라면, 자신의 부분을 할당받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거야(존재하면서도 있지 않아, 몫없는 적). 이때 또다른 형태의 예술이 등장할 수 있는거죠.
현재 나타나고 있는 예술을 통해 나타나는 담론은 알고보면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을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어요. 문제는 무엇인가요? 예술 자체에 관해 질문할 수 없다는 거에요.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경제의 지배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형태의 사고의 가능성의 조건이 실은 정치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거에요. 관계를 사고할 수 있는 무의식적인 조건은 언어의 씨는 모두 정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술의 반대항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위의 논의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 가운데 하나가 '정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술을 규정하고자 하는 활동들, 예술을 규정하는 어떤 무엇을 탐색하려는 시도가 유일하게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 우리시대 예술의 존재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는 질문을 던져보기. 예술의 특정한 장소란 무엇인가, 다른 종류의 활동과 구별되는 예술 활동은 무엇인가?
예술이 자기 자신의 존재조건을 사유하는 것은 놀랍게도 바로 정치언어 자체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지, 예술과 경제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반성으로부터 출현한 적은 없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역전적인 현상입니다. 놀랍게도, 정치로부터 정치 자체가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예술로부터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상상 조건을 촉발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거에요. 예술이 직접적으로 정치의 사유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또 예술에 책임을 전가할 수밖에 없는거죠. 예술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정치의 새로운 사유적 조건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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