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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critique d'art

교육과 혁명?

by jemandniemand 2020. 2. 19.

러시아 혁명의 위대한 사회주의 교육 실험 - 교육과 혁명

(하니 로젠버그, 1972)

 

"교육만큼 사회의 성격을 민감하게 보여 주는 지표도 없다. 교육은 학생들이 모두 성인 세대의 발자취를 따르고 해당 사회의 특징을 재생산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1918년 교육법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조: 학교급을 두 단계로, 즉 1단계 5년제(8~13세)와 2단계 4년제(13~17세)로 나눴다.(두 단계는 “통합”돼 있어서 보통 학생들은 모두 당연히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반면, 차르 치하의 교육 제도에서는 1단계를 졸업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상급 학교 입학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3조: 모든 학교와 모든 학년에 무상교육을 도입했다.

4조: 8~17세 아동에 대한 의무교육을 선포했다. 가령, 1조에서 말한 두 단계 교육 과정의 이수가 평균적 학생들의 목표라고 선언했다.

5조: 학교를 모두 남녀공학으로 한다고 확정했다. 이는 5월 3일 포고령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6조: 교육의 세속화를 명시해 모든 학교에서 종교 수업을 금지했다.

11조: 사립학교의 존재를 허용하고, 심지어 당국이 그 유용성을 인정한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국가 보조금 지급을 약속했다.(모든 학교가 무상이었으므로, 운영의 동기가 순전히 이타적이거나 실험적이어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사립학교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21조: 학생들이 모두 따뜻한 음식을 무료로 제공받는 무상 급식을 선언했다.

29조: 학교의 완전한 자치 원칙을 확립했다. 교사, 학생, 학교 노동자(가령, 경비원)가 모두 참가하는 ‘학교 공동체’가 학교 자치를 이끈다. ‘학교 공동체’는 상임간부회와 집행위원회를 선출해야 했다.

 

통합 노동 학교의 … 핵심 관심사는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은 모든 단계의 학교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전문 기술인의 관점으로 노동을 보지 않는다. 자기 직업과 관계 없이, 다양한 노동 형태들의 관계와 상호의존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새로운 삶의 건설자라는 관점으로 노동을 봐야 한다. 그런 이해력 훈련을 우리는 보통교육이라고 부른다.

 

1923년 교육법은 어쩔 수 없는 후퇴를 반영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3조: 학교급을 새로 구분했다. 1단계는 8~12세, 2단계는 12~17세 아동을 대상으로 했다. 2단계는 다시 두 단계(‘콘센티아’)로 나뉜다. 그 첫째 ‘사이클’은 3년, 둘째 ‘사이클’은 2년이었다.

5조: 학교를 모두 남녀공학으로 하기로 확정했다.

6조: 종교 교육을 금지했다.

7조: 사립학교를 금지하고 학교 교육에 대한 국가 독점을 선언했다.

10조: “각 학교의 교육적·재정적·행정적 활동에 대한 감독 책임은 교장이 맡고, 교장은 학교 평의회를 주재한다.”

11조: 교장은 지역 교육청이 임명한다고 밝혔다.

17조: 교사도 지역 교육청이 임명하거나 해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조는 (경비원 등) 기술직은 교장이 임명하거나 해임한다고 밝혔다.

20조: 학교 평의회는 모든 교사, 하위 직급의 대표 한 명, 교의校醫로 구성된다고 규정했다. 공산당, 노조, 지역 소비에트, 콤소몰의 지역 지부들이 각자 대표를 파견할 수 있었다.

22조: 학교 평의회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을 경우, 교장은 그 결정의 실행을 막을 수 있었다.

23조: 예외적인 경우, 교장은 학교 평의회의 사전 심의 없이도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26조: 8~17세의 아동은 모두 통합 노동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학교가 모자라 아동을 모두 수용할 수 없으면, 노동계급의 자녀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32조: 학교에서 하는 활동의 기초는 인간과 그 조직의 노동 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실용적 연구이다.

35조: 학교에서 하는 활동 일체와 학교 생활에 관한 조직은 모두 학생들이 노동계급 의식을 갖추도록 독려해야 한다. 또 유용한 생산 정치 활동을 위한 준비뿐 아니라, 자본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 연대에 대한 지식을 창조해야 한다.

36조: 모든 학교에서 학생 자치를 도입한다.

37조: 모든 종류의 벌을 폐지한다.

 

1918년 교육법과 달리 1923년 교육법은 [사회주의 교육의 이상에 대한] 재확인도 있지만 후퇴의 측면도 섞여 있다. 불가피하게 교육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이 둔화했고, 무상교육에 대한 언급이 사라져 전체 학생의 3분의 1에서 절반은 돈을 내고 학교를 다니게 됐다.(가난한 학생들은 제외였다.) 그러나 수업료 납부는 임시적 조처였다. 1925년 보편적 의무교육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수업료가 폐지됐다.

 

과학·기술 종합 교육이 사회주의의 기준인가?

과학·기술 종합 교육은 본디 인간의 다방면적 발달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노동의 존엄성을 옹호하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계율이 지켜지는 사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노동자 국가와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교육 형태다. 그러나 통합적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나라들의 진보적 교육자들도 과학·기술 종합 교육을 인정한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도 이 노선을 따르는 실험이 많이 있다. 달튼 플랜이나 듀이의 ‘프로젝트’ 교수법은 미국에서 수십 년째 진행되고 있는 유명한 실험이다. 영국 교육계에서 진행되는 프리스쿨 실험 등도 이 노선을 따른 것이다.

이처럼 과학·기술 종합 교육의 특정 형태는 크고 작은 변형은 있을지라도 여러 체제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체제들의 성격을 구별해 주는 기준은 통치의 양상, 즉 누가 노동자와 피고용인(과 그의 자녀)의 삶 ― 형식과 내용 모두 ― 을 결정하느냐이다. 달리 말해, 노동자 민주주의가 존재하느냐 여부이다.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 사회에서 관료가 성장하는 것의 진정한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유럽 혁명이 결국 패배하고, 스탈린이 관료적 위계의 정점에 선 절대적 독재자로 등극하자, 러시아 사회에서 관료의 성장은 1923년에 중요한 첫 걸음을 내디뎠고, 1928년 5개년 계획이 시행된 뒤로는 그 속도가 정신없이 빨라졌다.

1923년 교육법이 제정된 뒤로는, 학교 구성원이 모두 참여해 평등한 협력자로서 정책을 민주적으로 입안하고 책임자들을 선출하는 일이 더는 가능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이제 학교 평의회에 대한 권리가 없었고, 교과과정과 교수법을 만들어 내는 일을 도울 수 없었다. 교사들은 교장 임명에 관여할 수 없었고, 지역 교육청이 임명한 교장에게 종속됐다. 교장은 학교 평의회의 결정 사항이 이행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고, 학교 평의회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더는 없게 됐다. 교장의 급여도 점점 더 상당히 많아졌다.

누가 통치하느냐는 문제는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더 깊이 탐구할 가치가 있다.

학생들은 위계의 사다리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으므로, 학교 내 통치 권력 관계에서 학생들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느냐는 정치 풍토가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가장 정확한 척도이다. 따라서 필자는 가장 중요한 이 측면을 먼저 다룰 것이다.

 

 새 교육자들은 학교를 권위적인 1인 경영 체제로 운영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학생들을 서구의 학생들처럼 생기 없는 인간으로 만들 뿐인 성과 달성 압박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관료의 지시를 수행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 대중의 교육 수준을 급속히 끌어올리고자 했다.

 

무엇을 위한 배움인가?

나는 왜 노동하는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누구에게 어떤 정당성으로 지불받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