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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모더니즘_이장욱_시간의흐름_2019

by jemandniemand 2020. 2. 21.

 

 

 

 
목차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제1장 시인과 혁명
집시의 시집 ․ 블로크와 상징주의
강철로 만든 책 ․ 마야콥스키와 미래주의
사랑의 환유 ․ 아흐마토바와 아크메이즘
러시안 랩소디 ․ 예세닌
영원의 인상주의 ․ 파스테르나크
생각하는 사물들 ․ 브로드스키

제2장 시학과 미학
‘낯설게 하기’의 미학과 정치학 ․ 러시아 형식주의
커뮤니케이션 모형과 비유론 ․ 야콥슨
‘조건성’과 언어 우주 ․ 로트만
시적 대화주의 ․ 바흐친
미학의 혁명과 혁명의 미학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제3의 비유 ․ 엡슈테인
탈신화, 혹은 맥락의 예술 ․ 모스크바 개념주의

후주

 


  • 20세기 초 러시아 상징주의: 블로크

언어적 기화의 정도가 심할수록, 우리는 그 시를 '상징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트만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내적 재코드화'가 극대화된 세계이다.

 

이 반로고스적 특성은 '해체적'이라고 말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현실 공간의 지시성 안에서 한없이 '미끄러지는' 데리다적 세계가 아니라, 탈실험작 세계를 전제로 한 정신적 구심력을 제 안에 품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상징주의적 암시적 언어 안에서 말과 침묵은 끊임없이 교차한다. 언어에 의해 구현되는 '음악성'. 우리 시와 달리 낭송에 적합한 러시아 시의 음악적 억양 및 음운 체계는 극단적으로 강화된다.

부정대면사의 빈번한 사용, 음악적 리듬을 통한 정서적 환기, 모호한 언어. 블로크의 시편들에서 이 모호한 언어들은 이상적 여성-메시아의 이미지에 바쳐진다. 확실히 블로크의 초기 시들은 몽상적 신비주의와 여성에 대한 관념적 이상화에 편향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저 상징으로서의 세계에 균열을 초래한다. '실재(realia)'에 헌신하리리던 '실재 너머(reliora)'의 이미지는 서서히 이 현실적 세계의 우울한 개별성과 고독 앞에서 힘을 잃는다. 블로크가 걷는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는 저 소멸의 운명을 끝없이 반복하는 물질성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현세적 공간에 결박당한 저 환유적 인접성만으로 앙상하다.

그는 그 자신의 우울과 더불어,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실과 현재의 이 왜소한 파편성에 몸을 담는다. 그는 실제의 운행을 주재하는 어떤 힘,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의지를 넘어서 존재하는 힘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자연력(stikhiia)'이다. 물리적 자연의 이면에서 혼돈과 개별성과 무의미를 관할하며 세계의 변화를 창출하는 힘.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인텔리겐치아'와 지성이 아니라 보편적 '민중'과 혁명의 속성이다.

그에게 세계는 무인칭의 힘으로 가득하다. 세계와 자연은 개별성과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통합적인 힘, 긍정과 부정의 가치판단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모종의 '흐름'에 의해 규율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모순된 현상의 동시적 지각'이다. 모순의 공존, 모순의 충일. 

 

 

  • 1920년대 미래파 아방가르드: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마야콥스크기는 고뇌하되 우울의 의상을 걸치지 않으며, 고독하되 결고 내면에 유폐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시와 미학의 진원지에는 사회주의 혁명의 정치학이 있다. 

 

마야콥스키는 제정 러시아 말기의 뛰어난 모더니스트이지만, 혁명 이후에는 소비에트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미래주의자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코스모포폴리탄들이었으며, 어쩔 수 없이 과거 지향적이었던 슬라브주의적 정신 안에 감금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네들이 모든 '전통'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전위'를 자처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어의 물질성을 극대화시키면서, 동시에 그 물질적 전체성을 분해한다. 하나의 단어를 해체함으로써 형성되는 불연속적인 리듬. 언어학적 해체, 분할과 더불어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를 통한 시각적 배치도 중시한다. 언어는 회화의 방법론을 빌려올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회화적' 그래픽을 구성한다. '이성 너머의 언어' 즉 초이성어trans-sense language의 전략. 미래주의자들의 언어는 음성적 효과를 노리되 상징주의와 반대로 불협화음에 가까운 '반리듬'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우울과 몽상의 세계가 아니라 웃음과 냉소의 세계에 가깝다. 

 

기이하게 물질적. 대상의 한 측면을 확대하고 과장할 뿐, 일인칭 화자의 관념적 전언을 강조하지 않는 것. 도시의 아침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어휘들은 화자의 음울함이 아니라, 도시의 견고하고 완강한 비극성을 환기하는 데 기여한다. 

그는 애초부터 현재성과 당대성과 구체성의 기록자였다. 그의 작업은 의식적인 언어 해체나 전위를 빙자한 언어 실험이 아니다. '몸'이 받아들이는 실존의 언어. 마야콥스키의 언어는 지극히 '불순'한 것이다. 그의 언어들은 순수한 추상의 세계로 환원되지 않는 육체성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실존적 시간과 공간의 한계/경계를 넘어서고자 했으며, 나아가 실존하는 '몸'조차 확장하고자 했다. 그곳은 '신화'의 세계이다. 우주적 확장과 '불멸'에 대한 희망. 그의 혁명은 '영구 혁명'이라기보다는 '영원을 향한 혁명'에 가까웠다. 

 

마야콥스키는 1923년 레프(LEF, 예술 좌익 전선)를 조직 및 주도하고, 라프(RAPP,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에서 활동하는 등 열혈히었다. 당시는 아직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조차 없었을 때였지만, 이미 유물론 미학은 정치적 혁명에 상응하는 '미학적 반혁명'에 잠식되고 있었다. (...) 후에 루나차르스키가 말했던 '마야콥스키 속의 제2의 자아'가, 이제 마지막 말을 남길 것을 종용하였다. 우연과 적대적인 사건들의 불행한 연속, 그 시점에 첨예해진 국내의 정치 상황 속에서 악화된 환경이, 이제는 고통스러운 인간적 소외감으로 닥쳐왔다. 마야콥스키가 자살한 4월 14일은 러시아 구력으로 4월 1일이다. 마야콥스키의 친구들은 마야콥스키가 만우절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1920-30년대 사적 '실존'성과 수공업적 정교함: 아흐마토바와 아크메이즘(akmeism) 그룹

아흐마토바의 시에 대해 말할 때 내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국 '실존적'이라고 해야 할 삶의 피로와 괴로움들이다. 절제된 '절규'. 다만 온전한 '지금/이곳'의 현재성에 대해 아프다. '피투자'의 언어. 

 

무엇보다도 그녀의 시들은 '개인적'이다. '사적인' 진술. 회고조의 진술. 일상적이며, 무엇보다도 산문적인 느낌을 준다. 아흐마토바의 실제 생애와 겹쳐지면서 사적인 뉘앙스를 강화한다. '사적인 대화' 속으로 편입. 

 

1910년대 초, 페레르부르크에 '시인 조합(The Guild of Poets)'이라는 그룹이 출현한다.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그의 아내 안나 아흐마토바, 그리고 오십 만델시탐과 세르게이 고로제츠키 등이 그 구성원이었다. '시인 조합'의 멤버들 역시 상징주의라는 '아버지'의 부정을 동력으로 삼아 제자리를 마련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모임을 '시인 조합'으로 명명한 것은, 시적 '영감'과 '예언'의 언어가 아니라 수공업적 정교함의 언어에서 출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투명하고 명료한 언어 미학을 제시. '아름다운 명료성'. 우회적이며 더 섬세한 방식으로 탈상징주의의 영토, 시적 모더니즘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흐마토바의 '태양'은 수많은 상징성으로 포화된 태양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저 하늘에 구체적으로 빛나는 태양이다. 이제 아흐마토바의 태양은 태양을 보는 자의 내면과 실재하는 태양 '사이'에 있다. 그것은 '심상'이면서 '심상'이 아니다. 객관적 대상과 주관적 내면의 가장 모호한, 그러나 가장 절묘한 지점. 

 

아흐마토바와 아크메이즘과의 차별성. '이상한 파편들'. 앞뒤로 배열된 사실적 대상들에 대한 소묘와 더불어, 모호하고 넓은 여백을 지닌 '이야기'. 시적 완결성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라 아흐마토바라는 커다란 텍스트의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아흐마토바라는 텍스트의 내부에는 이제 저 사실적이며 경험적인 '지상의 사랑'이 파편처럼 널려 있다. 사랑의 '본질'을 말하려하기보다는 사랑의 근처에 놓인 사물들을 끌어들이고는 스스로 사라진다. 이제 독자는 파편화되어 미끄러지는 사랑의 '서사'를 듣는다. 우리는 생략된 부분, 지극히 개인적인 듯한 '이야기'를 스스로의 내력으로 채우고, 그런 후에야 아흐마토바의 불우를 함께 느낀다. 바로 이때문에 아흐마토바의 시는 '뜻밖에' 대중적이다. 

 

아크메이스트들은 대중적이고 민중적이기보다는 시의 고전적 품격과 '문학적 기억'에 충실했다. 그것은 아흐마토바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문학 '전문가'들에 의해 재발견된 만델시탐과 달리, 아흐마토바는 지금도 대중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사랑은 그녀의 시적 항수이다. 그녀의 사랑은 간결하지만 때로 무력하고 무능력하다. 그녀의 사랑은 가장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당신, 유일하게 실재하는 당신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초월이 아니라 세속에 머물며, 지고의 것이 아니라 변전의 '이야기'에 몸담는다. 그러므로 그녀의 사랑은 강력하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본명은 안나 안드레예브나 고롄코였는데, 고롄코는 러시아어 '고통(gore)'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고리키는 이 단어로 만든 필명이지만, 아흐마토바는 본명이 고롄코였다. 

 

 

  • 러시안 랩소디: 세르게이 예세닌
  • 탈볼셰비키 정치학: 보리스 파스테르나
  • 관념적 육체성,  개인주의의 미학: 이요시프 브로드스키

  • 러시아 형식주의

젊은 형식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고리타분한 대학교수들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종교철학적 상징주의자들이었다. 1916년에 결성된 '오포야즈(Opoiaz, 시인연구회라는 뜻으로 형식주의의 핵심 그룹)'의 멤버들은 특히 상징주의의 형이상학과 초월주의에 생래적인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클롭스키의 명제는 일차적으로, 말 자체를 정신성과 형이상학의 도구로 생각하는 상징주의적 경향을 부정한다. 형식주의자들은 완고한 '유물론자'들이었다. 하나의 에콜이 '형식적 방법', 혹은 문학의 '자율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제기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러시아 청년들이 말이다. 문학을 문학으로 만드는 것, 즉 '문학성literariness'에 대한 집착은 형식주의자들의 항수였다. 

 

예술을 'art'라고 표현할 때, 이 어휘는 인간의 '의도'와 '인위적 가공'이 개입해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때 과학자로서의 문학연구자들이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재료 자체가 아니라 재료가 가공되는 방식의 총체, 즉 '기법'이다. 기법은 언어 구조물을 언어 구조물로 만드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대체 그게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형식주의자들의 글이 있다. "오직 새로운 예술 형식의 창조만이, 인간에게 세계의 경험을 돌려주고, 사물들을 부활시키고, 페시미즘을 없앨 수 있다."(시클롭스키)

 

형식주의자들의 개념 가운데, '낯설게 하기' 이 용어는 지금까지 형식주의의 선언서처럼 인식되어 있는 시클롭스키의 논문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에서 정립된 것이다. 시클롭스키는 대상의 '인지'와 대상의 '발견'을 구분하는데, 이 구분은 논의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닌다. '낯설게 하기'는 '지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예술의 대응이다.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매개하는 인식론적 문제, 현상학적 괄호 치기의 적극적인 요구. 궁극적으로 '삶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데 바쳐진다. 

관례적인 언어를 배제하는 순간, '지각의 경제성'을 탈피하는 순간, 대상에 대한 지각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어려워진다.'

 

'낯설게 하기'는 텍스트 자체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수용자의 '자동화'된 관례적 감각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는 언어학의 차원이 아니라 제도에 대한 항의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분명히 정치경제학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논의될 필요가 있다. 

 

이후 문예학의 '진화'에 비추어 초기 형식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재료로서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그네들의 비평사적 입지는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형식주의를 내부로부터 허물고 새로운 길을 열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티냐노프와 야콥슨이었다. 특히 티냐노프가 하나의 문학 작품이 지니는 세 가지 '기능'[1]들을 분별했을 때, 그는 형식주의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나 구조주의적 문학론으로의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형식주의의 분석 대상은 하나의 텍스트를 벗어나서 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 그리고 텍스트와 코드화된 삶의 구조 사이의 관계로 발전해나간다. 

 

 

  • 커뮤니케이션 모형과 비유론: 야콥슨

관례적으로 통용되는 '본질'과 '목적'을 삭제할 때, 그제야 우리는 대상 자체로서의 대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리얼리즘적 총체성'은 개별, 부분, 우연들의 자족성과 현실성을 희생하는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야콥슨이 보기에 현실성에 대한 작가적 열망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리얼리즘'이 있고, 수용자(비평가, 문학사가, 독자)가 현실에 충실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의 '리얼리즘'이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자의적으로 쓰이고 있음은 자명하다. 리얼리즘 개념이 자의적이고 상대적이며 분별없이 쓰이고 있다!

 

야콥슨의 목적은 근본적 차원에서 리얼리즘 '개념'의 난맥상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야콥슨은 자주 리얼리티에 대한 '지향'을 멈추지 않는다. 야콥슨에게 세계는, 혹은 현실은, 궁극적으로 기호에 의해 포착된 '담론의 우주'에 다름아니다. 우리의 현실 감각은 사실 우리가 익숙해진 '표상ideogram'이 하나의 '정형formula'으로 굳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야콥슨의 리얼리즘은 현실 자체가 아니라 그 표상과 정형에 대한 관심으로 이전해가는 것이다. 

 

야콥슨의 커뮤니케이션 도식... 발신자(addresser)와 수신자(addresse)가 있고, 그 사이에 관련 상황context, 메시지 자체message, 접촉 상황contact, 약호code 등 네가지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각각의 항들에 기능function을 부여한 정보 모형. 

 1) 기능 가운데서도 지시 기능(referential function)

 2)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형이 바뀔 수 있음. 우리는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 맞추어 '접촉 상황' 같은 것을 '접촉 상황'과 '매체 상황' 등으로 세분하여 배치할 수도 있다. 

 3) '시적 기능'은 언어의 자율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용어일 뿐, 장르로서의 시에 대한 성찰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4) 모든 언어는 복수의 기능 위에서 운용된다. 시적 기능과 함께 표현적 기능이나 메타 언어적 기능 등 다른 요소들을 미묘하게 활용한다.

 5) 지시적 기능까지 포괄.

 

이제 예전부터 보아오던 습관적인 관찰 방식에 따라 사물을 바라보는 것, 가령 라파엘로식이나 보티첼리식으로 재현하는 '소박한 리얼리즘'은 '원시적 환상'으로 기각된다. 나아가 '정태적이며 일면적이며 고립된 지각'을 중시하는 고전 미술은 일종의 시대착오로 치부된다. 

 

야콥슨은 수많은 대상들을 편력하였으되, 그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수많은 변항들(variations) 가운데에 있는 불변항들(invariants)을 찾으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표현만큼 구조주의의 핵심 명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 기호학의 로트만

아이젠시타인과 스타니슬랍스키의 차이는 아이러니적이다. 혁명 러시아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자 했던 에이젠시타인이 양식적 스타일을 채택하고, 혁명 초기에도 고전 작품들으르 무대에 올려 한때 '부르주아적'이라고 지탄 받았던 스타니슬랍스키는 혁신적인 리얼리즘적 연기론을 방법으로 채택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적 리얼리즘과 방법으로서의 실재적 리얼리즘은 때로 양립하거나 모순을 이룬다. 다만 나로서는, 이질적인 이 두 리얼리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무언가 새로운 미학을 기대해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에이젠시타인과 스타니슬랍스키의 상반되는 방향은, 로트만의 용어로 '조건성'을 수용하고 활요아는 방식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몽타주는 영화적 '조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현실에 닿으려 하는 반면, 메소드는 기존의 연극적 '조건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실재에 닿고자 한다

 

순정만화 속 인물이 실제 공간에 나타난다고 상상해보자? = 무라카미 다카시??

현실공간에서 보면 그것은 기괴한 생물이다. 순정만화 속의 인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우리의 감각이 잘못된 것일까?

인간에게는 하나의 독자적인 가상 세계를 그 세계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분하여 느끼는 재능이 있는 것이다. 로트만의 '조건성' 특히 '일차적 조건성'은 바로 이런 현상들과 관계가 있다. 

 

조건성은 물리적인 프레임뿐만 아니라, 그 프레임 안에 재료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과정과, 그 과정을 인지하는 수용자의 태도에 공히 관련된다.

 

<예술 텍스트의 구조>에서 로트만은 1차 모델화 체계와 12차 모델화 체계라는 다소 난해한 용어를 제시한다. 1차 모델화 체계라는 것은 자연언어와 인공 언어를 뜻한다. 2차 모델화 체계는 신화, 예술, 종교 등 문화 현상 전반을 지칭한다. 

 

로트만이 이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하나의 텍스트가 독자적 기호 우주를 이루면서 무한한 세계를 수용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보 이론이 개입한다. 

 

프레임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프레임의 내부로 들여오는 순간, 혹은 프레임 안의 기호를 다른 기호들과 관련시키는 순간, 기호의 의미는 프레임 내부의 세계 안에서 재편된다. 이것을 로트만은 코드 변환(recoding)이라고 불렀다. 

프레임 내부에서 인물과 인물, 사건과 사건의 '관련성' 이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동일성의 미학: 정해져 있는 요소들을 무한히 반복하고 재연함으로써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 

이질성의 미학: 문화에 대한 자의식. 비예술적 요소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아방가르드는 '조건성의 교란. 조건성의 부정'. 환상에 의해 자연스러워 진 것을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대체하는 것. 수신자나 향유자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조건성을 교란하고 삭제하는 것. 

 

마이머스 장치: 수신자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에, 그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특정 장르 혹은 작품이 당대의 미학적 지평 안에서 해석되어야만하는 이유. 

 

번역: 수신자는 발신자의 코드를 자신의 코드로 번역하는 능동적 해석자. 

정보 이론: 정보량, 정보의 전달 능력 차원에서 시를 보는 것. 

엔트로피 개념: '의미의 불확정성', 정보 선택의 폭. 일정한 기호 안에 일상 언어보다 훨씬 더 많은 비트의 정보량을 담는것. 예술가는 이 무한한 무질서들을 자신이 선택한 예술적 재료 속에 가두기 위해 힘겹게 싸우는 자이다. 

 

요컨대 하나의 문화는 수많은 텍스트들이 겹쳐 있는 상태이며, 하나의 텍스트는 그 내부에 수많은 다른 텍스트들을 감추고 있다. 로트만이 '텍스트 안의 텍스트' 라고 부른 것은 단순한 인용이나 패러디의 문제를 넘어서 기호-우주를 형성하는 출발점인 것. 

 

  • 대화주의의 바흐친

'언어'는 발화를 가능하게 하는 잠재적 시스템이며, '말'은 구체적 맥락 안에서 쓰이는 화용론적 세계의 산물이다. 바흐친이 보기에 체계 분석은 '바로 이것'의 고유성을 삭제하고 그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보편적인 공식을 추출하고자 한다. 

모든 존재는 지금 이곳에 있으므로 다른 곳에는 부재하며, 지금 이곳에 대하여 다른 어떤 알리바이도 제시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언어 철학을 '초언어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모든 언어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해 있다는 바흐친의 생각은, 모든 언어가 '나와 너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과 같은 맥락에 있다. 나와 너의 관계와, 너에 대한 나의 자세와, 나에 대한 너의 반응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말. 말은 현재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과거와 잠재적 미래에 예측 가능한 나와 너의 관계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모든 말, 모든 문체에는 넓은 의미의 정치학이 개입하는 것이다. 

 

모든 언어를 구체적 콘텍스트 안에서 다루는 것, 말이 존재하는 역동적 현장을 삭제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 바흐친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중요하다. 인간학의 대상인 모든 말은 인간들의 욕망에서 발원하여 인간들의 시선이 이합집산하는 사회로 쏟아진다. 그 '사회'가 마이크로적이든 매크로적이든, 이 욕망들과 시선들이 맺는 무한한 관계야말로 모든 말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 세계는 (1) 끊김이나 단절이 없는 무한한 세계, 바깥이 없는 세계 (2) 수많은 말들이 교차하면서 서로를 규정하고 종결시키고자 투쟁하는 세계.

현실 세계에서 '절대적 의미'나 '절대적 가치 판단'이란 일종의 형용모순에 불과하다. 내가 너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평가'하는 순간에, 나는 너를 고정시킨다. 대상을 고정시키지 않는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평가'하는 순간에도, 너는 움직이고 변화한다. 현실이란 '의미'의 고정성을 거부하는 '거대한 시간'의 세계이다. 

 

바흐친은 시와 소설의 장르적 구분을 폐기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서정시의 이상주의를 버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언어들에 주목. 현재성으로 충만한 언어들. 디오니소스적 혼돈. 다성성. 그로테스크한 '몸', 광장에서의 외침, 권위적 가치의 해체. 

낭만주의와 서정시는 무한한 정신과 유일한 자아를 전제로 세계를 규정하고자 하는 일인칭 내면의 권위에 의존한다. 낭만주의의 존재론적 자기동일성, 속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치적 자기동일성, 초기 상징주의의 종교철학적 자기동일성 등. 

 

서정적 수치는 곧 시적 목소리의 분열을 초래한다. 이 때 분열이란 자기 분열적인 언어 실험이나 콜라주 같은 모더니즘적 기법과는 다른 맥락에 있다. 그것은 단일한 가치와 단일한 진리치를 담지한 언어, 순수하고 보편적이어서 이질성이 틈입할 수 없는 '나'의 언어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 

 

현대란 관례적 의미의 '시'를 끊임없이 배제할 수밖에 없는, 덧없고 순간적인 미로 미만한 세계인지도 모른다. 이 세계를 전제로 씌어지는 시를 '현대시'로 규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바흐친적 의미의 '서정적 수치'가 시인의 개인적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대성의 본질적 조건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서정적 수치'에 의해 시인은 자기 자신의 말을 '유일한 말'이 아니라 '수많은 말' 중의 하나로 기각한다. 

 


[1] 구성적 기능: 텍스트를 이루는 개별 구성 성분들의 상호연관성 / 문학적 기능: 한 작품과 문학 계열체들의 상호연관성 / 언어적 기능: 한 작품이 현실적 삶의 코드들과 맺는 상호연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