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17>은 단 하나의 임무 - '영국군 제8보병 연대 소속 병장'이 '다음날 오전까지' '참호 밖 무인지대(No man's Land)를 거쳐 14km 떨어진 데본셔 연대에 있는' '매켄지 중위에게' '명령서를 전달'해야 한다 - 를 완수하기 위해 주인공이 위험을 무릅쓰고 1차 세계대전의 현장을 횡단하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별다른 속임수나 반전도 주지 않고 게임의 규칙과 구도를 그대로 따르면서 주인공이 어떻게 그 임무를 완수하는지를 1인칭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VR 기기를 쓰고 전쟁터로 프로그래밍된 가상현실을 직접 경험(혹은 체험)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던 1시간 59분. 함께 영화를 보러온 친구는 내게 1차 세계대전 참호전(Trench warfare)**의 끔찍함을 다룬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책을 소개해주었고,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아날로그식? 1세계 내에서 일어난?) 전쟁터의 현장( 보기 싫다던 전쟁영화를 새삼 보러가면서, 지금은 3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사건에 대한 심경이 더더욱 복잡해졌고, 이 숨막히는 리얼함/ 전쟁터에서 '생존'하는 과정의 처절함을 영화로나마 상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는지 혹은 이또한 결국에는 전쟁을 낭만화시켜 버리는 짓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을 이 책을 통해 좀더 가까이서 엿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가 그당시의 전쟁상활을 얼마나 충실히 묘사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 1차 세계대전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한 가지로 꼽을 수 있는 참호전은 대치하는 양 군이 서로 길고 깊은 참호를 파 놓고 버티면서 상대의 돌격을 참호 속 보병과 기관총에 의지해 막아내는 전쟁 방식을 의미한다. 포격과 가스,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막힌 전역의 한가운데는 무인지대라 불리며 사상자의 시체를 파먹는 쥐들만 살아 있는 공간이 되었다.
한 영국군 장교는 바로 전까지 프랑스군이 담당하던 참호로 투입되면서 느꼈던 불안감을 이렇게 묘사했다. '흉벽이라는 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커다란 흙무더기만 있었을 뿐, 배장은 우리 머리 위 높이까지 솟아 있었다. 모래주머니 칸막이가 설치되지도 않았고, 참호의 양쪽 면도 전혀 보강되지 않은채였다. 귀족의 정원에 놓인 석조 화병처럼 어쩌다 막대기 다발이 놓여 있기도 했는데, 그나마 단조로운 참호가 생기가 돌았다'.
한 프랑스 병사는 청음 초소의 끔찍했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초병의 고통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초병들은 절대 고독의 상태에 놓여 있었고, 따라서 풀밭에서 동물이 미동을 하기만 해도, 달빛 속에서 나뭇가지가 조금만 흔들려도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
병사들은 야간에 전방 참호로 투입되었다. 포병대의 위협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이동은 교통호를 통해 이루어졌다. 각 소대는 90미터 간격으로 분리되었다. 이 역시 포격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참호 투입 과정 자체가 매우 힘든 활동이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병사들은 앞 사람을 따라 걷다가 넘어지기 일쑤였고, 바닥은 진흑과 물웅덩이 지천이었다.
'모든 병사가 생명 없는 자동인형으로 변해버린다. 모든 병사가 로봇처럼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분투한다. 그들은 단호한 메시지를 기계적으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한다. 이렇게 메시지가 뒤쪽으로 전해진다. 그들은 계속해서 비틀거리면서 걷는다. 병사들이 의식하는 것이라곤 짊어진 짐의 무게뿐이다.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의 가죽끈, 흘러내리는 땀과 갈증, 드러누워 자고 싶은 욕구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뒤에서 계속 재촉받던 병사들은 멈췄다 하면 그 자리에서 저주를 퍼붓다가 어느 순간 선 채로 꾸벅꾸벅 졸기 일쑤이다'
'삽질이 계속되면서 참호는 깊어졌지. 시체와 꼴사납게 푸르딩딩한 다리로 썩어가던 그곳. 목이 긴 부츠를 신고, 허우적거리며 대호를 따라 기었지. 몸뚱이와 얼굴은 아래로 향하고, 수렁 같은 진흙 속에서, 헐겁게 채워 짓밟은 모래 주머니처럼 몸부림쳤네. 흠뻑 젖은 엉덩이, 불룩하게 뭉친 머리칼이. 어지러운 진흙구멍에서 잠을 청했지. (지그프리드 새순)'
참호전 방식
'전방, 예비, 지원 진지라는 3중의 개념이 전쟁 기간 내내 양측에 기본적 교리로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이 발전하면서 각각의 중요성은 크게 바뀌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사항은 최전방 참호의 병력 투입 문제였다. 무인지대를 횡단해 공격해 오는 적군을 분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발로. 효과적으로 반격하기 위해서 동원 가능한 예비 병력을 남겨두는 게 당연. '능동적 구역'은 양 방향에서 수동적 구역에서 측면 공격을 퍼붓겠다는 의도로 크게 강화된 진지. '수동적 구역'에는 철조망이 대량으로 가설되었고, 초병은 소수만 투병.
1917년에 힌덴부르크가 팔켄하인 후임으로 서부 전선 최고사령관이 되면서 독일군도 철저하게 이런 방어 체제를 채택했다.
(영화 중 톰의 대사) "이럴 거면 성직자나 될걸 그랬어. 더 맛있는 밥 배불리 먹을 줄 알고 여기 왔는데. 배고파 죽겠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프랑스와 플랑드르에 주둔한 모든 군대가 잘 먹었다. 인간 신체의 칼로리 요구량에 대한 조사 연구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고, 일일 영양 섭취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려는 온갖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식량이 실제 전선의 부대원들에게 고스란히 도착하지는 않았다. 상당량이 분실되었고, 도난당했고, 그냥 버려졌다. 전투 중에는 따뜻한 음식물, 아니 음식물 자체를 거의 먹을 수 없었다. 부대원들은 반복적으로 식량 배급이 며칠씩 중단되는 상황을 경험했고, 이미 휴대하고 있던 음식물로만 버텨야 했다. 그런 다음에는 장교가 승인해야만 개봉할 수 있는 비상 휴대식량을 먹었다.
(영화 중 술병을 건네주며 행운을 빌어주는 다른 대대의 전우)
부대원들에게 공급된 다른 기본 필수품은 술이었다. 럼은 1914년 말에 악천후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처음 배급되었다. 1916년에 킹스오운요크셔 경보병대의 한 장교는 <더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최근 자신이 부재한 상태에서 럼 단지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술항아리에, '다른 동료들을 생각하고, 전달하시고'라고 쓴 고지문을 붙였다고 했다. 그 술항아리는 마지막 병사에게 당도했을 때에도 여전히 반이나 남아 있었다.
(영화의 초반부, 어머니의 서신을 받고 기뻐하는 톰 "우리집 맬피가 새끼를 낳았대" )
음식이나 술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위안이 되었던 것은 가족과의 서신 교환이었다. 가족 및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행위가 아주 중요했다. 이 과정을 통해 병사들은 전쟁에 투이보디기 이전의 온전한 정신 상태를 마음으로나마 경험했다. 모든 병사들이 참호에 머무를 때나 휴식을 취할 때 편지를 쓰거나 집에서 보내온 평범한 내용의 편지를 거듭거듭 읽으면서 휴식 시간의 상당 부분을 보냈다.
(블레이크의 죽음을 애도하는 스코필드와 그들의 전우애)
병사들은 과거의 생활 방식과 단절되어 간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더 서로에게 의존하면서 도움과 위로를 구했다. 여러 해에 걸쳐 서부 전선의 모든 군대에서 연대의식, 곧 소속 부대에 대한 최고의 자부심과 충성심이 자라났다. 후방의 국민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임무를 그들은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막심함이 병사들에게 기묘한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원혼입니다". 다수의 병사들에게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분명히 전쟁이 부과하는 최악의 고통 가운데 하나였다.
(데본셔 연대, 공격 지시가 떨어지기 직전, 작은 음악회가 한창이다)
병사들의 저녁 시간조차도 그들을 위한답시고 사단 음악회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다수의 사단이 사회에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위무해주었던 경험이 있는 병사들을 어느정도 내부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임무를 완수한다면 훈장 수여 대상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톰)
명예와 의무라는 모호한 명목 아래 뭉뚤그러져 있던 전반적 임무 속에 조국애가 스며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및 에드워드 치세기의 교육과 선전이 당대의 전반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했고, 그 속에서 장교와 사병 모두가 가족과 조국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동맹국까지도 방어하는 일에 일어서야 한다는 의무감을 진정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
(메켄지 중위에 대한 경례, 격식에 집착하는 듯해 보였던 데본셔 연대의 참호 현장)
전장을 지배한 새로운 기술. 지휘관들의 무능력. 세기의 전환기에 유럽의 장교 집단 사이에 만연했던 계급 제도의 절대적 중요성과 연공서열에 대한 경직된 의존성. 낡은 형식과 절차가 존중되었다. 영국에서는 밀로드(영국의 귀족)가, 프랑스에서는 귀족이, 프로이센에서는 융커(독일의 귀족)가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산업 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흔히 소외되었던 계급 출신이다. 1914년의 장교들에게, 그리고 여전히 1918년의 지휘관들에게 전쟁이라는 개념은 나폴레옹 전쟁의 워털루와 그 이전 사태의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메켄지 중위의 말, 이곳에서는 희망이 가장 위험한 믿음이네)
일부에서는 전쟁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점점 더 커졌다. 상황 인식은 곧 깊은 절망으로 이어졌다. 어떤 때는 부질없다는 끔찍한 생각이 무거운 짐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헛된 노력이 무한히 계속될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들었던 생각
1. 예술의 미래는 VR에 있다. '재현'의 끝판왕. 재현의 한계, 재현의 불가능성, 대안으로서 비재현을 운운하지만,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닌 세계를 내것으로 체험하는 듯한 기분만큼 강력한게 없는 듯하다.
2. 인정하기 싫지만 중간중간에 삽입한 장치들의 작위성을 알고 보는 와중에도 정말 잘 만들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연의 끈질긴 생명성을 보여주는 꽤나 클리셰적인 영화 장치들인데도 일종의 감화를 받게 되고, 전우의 죽음에 슬퍼하는 주인공의 푹 숙인 고개와 표정에 눈시울이 찌르르 뜨거워지고, 한단계씩 통과하고 통과하면 국면이 전환하는 방식의 전개가 유치하고 부자연스럽지만 동시에 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고, 폐허가 된 전쟁 현장의 한밤중에 사방에서 터지는 조명탄과 빛과 어둠이 수없이 교차하는 장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임무 완수 직전의 상황에서 슬슬 올라오다가 임무를 수행하고 난뒤 물밀듯 밀려오는 허무함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 전쟁에 대한 깊은 환멸을 보여주는 대사들까지도, 클리셰인 줄 알면서도 그 틈새를 비집고 어떤 울림이 느껴진다.
3. 촬영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보여준 영화. 1인칭 기법의 생생함. 전쟁터의 냄새와 촉감까지도 느껴질만큼. 톰 블레이크가 배에 칼을 찔렸을 때에는 내 몸이 반응해버려서 구역질이 났다.
4. '전쟁'을 영화화한다는 것의 비윤리성? 왜 하필 2020년에 1차 세계대전을 복귀시키고 있는가? 그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보고 싶다. 영화를 기획하게 된 저의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고 난 나는 영화를 보기 전의 나와 어떤 것이 달라졌는가? 오락 이상의 무언가를 분명히 다루고 있는데, 그 무언가가 무엇일지. 여러가지 생각의 파편들이 둥둥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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