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문
로트만, 나의 동시대인 4
제1부 이론과 문화
1장 책에 따라 살기: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 16
1 책에 따른 삶 23
2 문학의 신성화 혹은 문학중심주의 25
3 행위시학: 삶의 예술 32
4 ‘유토피아적’ 미학주의와 ‘미학적’ 유토피아주의 38
5 2원적 모델의 매혹과 위험 48
2장 문화시학의 길: 로트만의 ‘행위시학’ 방법론 52
1 텍스트의 이론과 행동의 이론 60
2 행위시학: 문학연구와 문화이론의 ‘사이’ 62
3-1 문학과 삶의 변증법: 러시아 형식주의와 소비에트 구조주의 66
3-2 문화론적 접근: 행위시학의 관점 71
3-3 행위시학의 방법론: 기호학과 시학 사이 78
3-4 행위시학의 입장: 신화와 이데올로기 사이 86
4 예술(문학)과 현실(권력)의 문화적 모체 91
3장 러시아 이념과 러시아 이론: 로트만 이론의 문화적 정체성에 관하여 96
1 반성적 성찰 102
2 문화기호학: 현대의 마스크를 쓴 역사철학인가 106
3 내 것과 남의 것: 마법적 시스템 대 종교적 시스템 112
4 내 것과 남의 것: 분절적 모델 대 비분절적 모델 118
5 러시아 이념 대 러시아 이론 124
제2부 영화와 도시
4장 영화기호학과 포토제니: 로트만의 ‘신화적 언어’ 133
1 포토제니: 영화기호학의 ‘외부’ 138
2 영화와 신화적 언어: 고유명사의 문제 146
3 클로즈업: 고유명사로서의 얼굴-기호 152
4 영화와 의식의 이종성: 이분법에서 혼종성으로 159
5장 문화사와 도시기호학: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162
1 기호학과 역사연구: 문화사의 기호학 167
2 로트만의 도시기호학과 상트페테르부르크 169
3 도시명의 기호학: ‘베드로’의 도시에서 ‘표트르’의 도시로 174
4 도시 공간의 기호학: 페테르부르크 신화와 텍스트 177
5 19세기 페테르부르크: 저개발의 모더니즘 187
제3부 대화와 주체
6장 문화 상호작용과 글로컬리티: 바흐친과 로트만의 ‘대화’ 개념 194
1 합성어 글로컬리티가 의미하는 것 201
2 바흐친의 자아 모델: 경계적 실존과 대화 204
3 로트만의 기호계: 혼종성과 비대칭성 210
4 영향에서 대화로: 문화적 대화와 변형의 메커니즘 215
5 글로컬리티, 대화적 동의 혹은 다시 쓰기 225
7장 러시아적 주체: 바흐친과 로트만의 ‘자아’ 개념 228
1 바흐친과 로트만의 자아 모델 233
2 바흐친의 내적 발화: 비공식적 의식과 내적 대화성 237
3 로트만의 자기커뮤니케이션: 인격의 재구성과 통사론적 축약 242
4 바흐친과 로트만: 자기를 초과하는 인격 대 자기조직화하는 체계 249
5 자아에 관한 러시아적 모델 254
미주 258
원문출처 284
참고문헌 285
찾아보기(인명) 299
찾아보기(작품명) 306
찾아보기(용어) 310
때로 이념은 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지적) 프레임을 넘어서 그에 따라 세계를 변화시킬 (현실적) 매뉴얼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범인들의 도덕률을 초월할 수 있는 초인은 가능하다'라는 니체식의 명제를 19세기 러시아의 법과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라. 그는 그와 같은 가설적 명제를 현실 속에서 '실험'하기 위해 '반드시' 직접 도끼를 손에 쥔다.
일단 이념을 바아들인 후에는 반드시 '그 이념에 따라 살 것'을 지향하는 이런 태도.
2원 모델, 새로운 것을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는) '연속'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의 종말론적 '교체'로서 사고.
오늘날 다시 새롭게 '유토피아를 발명'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크게 제기되고 있다. "삶과 예술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서로 일치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이다."
가령, 오늘날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광신'이라 불리는 한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을 지향하는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광신을 "어떤 원칙과 믿음에 있어 타협을 거부하는 태도" 혹은 그에 따른 "신념의 윤리"로 규정했다. ... 요컨대, 싸워야 할 전투들이 있는 한 광신 없는 역사는 없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제 더 이상은 아무도 '책에 따라' 살려 하지 않는다. 그런 변혁의 시도는 더욱더 끔찍한 파국과 불행을 가져올 뿐이라고 굳게 믿게 된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차가운 '냉소적 이성'의 시대에 내가 자꾸만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바흐친의 말이다.
요컨대, 문학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문학보다 더한 어떤 것'이어야 했던 러시아 문학은 철학적 사유의 시험대'이자 사회 변혁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으며, 민족의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이자 미래를 향한 예언의 기초였던 것.
시인은 예언자. 시인이라는 단어는 원칙적으로 직업성을 배제.
문학과 현실을 서로 '섞어'놓으려는 경향, 보다 정확하게는 "이상적 영역의 규범에 따라 일상적 삶의 영역을 재구축하려는 지향"은 18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작가는 현실에 존재하는 실제 독자(구매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창조해내야 할 목표로서의) 미래의 이상적 독자를 지향하게 된다.
행위시학(행위기호학), 일상 행위의 시학을 논한다는 것은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했으며 직접적으로 미학적인 것으로서 체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 앞에 일종의 암호화된 '텍스트'로 등장하는 해당 시기 인간들의 구체적인 행위를 '해독'할 수 있게 하는 숨겨진 '문화적 코드들'이란 바로 그들의 행위가 지향했던 '문학적 모델'들이다.
요컨대, 로트만이 선택한 이 시기의 인간들은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개인적 행위, 일상적 담화, 결국에는 삶의 운명까지를 문학적, 연극적 범례를 따라 구축했으며, 나아가 그것들을 직접적인 미학적 체험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예술적 잣대를 통해 삶을 바라본다는 것, 삶 속에서 예술을 '산다'는 것은 18-19세기 초반의 러시아 귀족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까?
'삶이 예술을 서둘러 모방했던' 이 시기 인간들은 일상적 삶을 "마치 무대위에 선 것처럼" 살아갔다. 무대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의식적으로 '연출'해낸다는 것, 자신에게 특정한 '배역'을 부여하고 그 자신이 '등장인물'이 됨으로써 결국 스스로의 삶을 '플롯'을 지니는 것으로 '창조'해낸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 무대 위의 삶을 연출함으로써 스스로 플롯을 지닌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일상적 삶의 무인칭적 흐름에 예기치 않은 반전으로서의 '사건'을 부여한다는 것, 인간 행위를 집단적 행위의 자동적 지배(관습)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삶과 행위의 주체인 인간에게 적극적 '선택'의 가능성을 부여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기호적 행위는 언제나 선택의 결과.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행위의 미학화를 향한 이들의 지향이 삶과 에술을 '섞어'놓으려는 의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한 날카로운 경계의식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은 반드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그건 '책에 따른 삶'이라는 특정 모데르이 작용이 결코 로트만이 선택한 시기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행위시학을 다룬 한 논문의 말미에서 로트만은 이렇게 지적한다.
상징주의를 비롯한 러시아 모더니즘 미학 전반에서 미학적 행위를 추동했던 가장 핵심적인 명제는 삶과 예술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보다 정확하게는 삶은 예술을 따라 '총체적'으로 변화됨으로써 그 자신이 이미 예술과 다르지 않은 '영원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이르는 18-19세기 초반, 로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술이 삶에 배치되지 않은 채 마치 그것의 일부인 것처럼 나타났던 시대, 예술이 감정들의 직접성과 사유들의 진실성을 파괴하지 않은 채 삶과 서로 섞일 수 있었던 시대"에 행위시학이라는 독특한 현상으로 구현될 수 있었던 '책에 따른 삶'의 모델은 이후 러시아 모더니즘의 유토피아적 미학주의 속에서 어떻게 변모되어갔을까?
로트만의 '행위시학' 방법론
문화체계 안에서 수행되는 인간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행위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
'텍스트의 이론'은 어떻게 '행동의 이론'으로 확장가능하며, 그러한 확장은 문화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떤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제시하는가?
그 자신이 '사회적 존재'로서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문학 텍스트가 결코 현실 맥락에서 벗어난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고 할 때, 무엇보다 그것은 문화체계를 구성하는 일련의 힘들이 서로 충돌하며 경쟁하는 어떤 '장소'로서 간주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생산, 유통, 소비를 둘러싼 문학 텍스트의 '삶'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각종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조건과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러시아적 주체: 바흐친과 로트만의 '자아'개념 (228~)
자아 중심적 모델에 대한 거부.
자아란 언제나 사회적 과정으로서 '형성 중'에 있다. 1920년대 프로이트주의와의 논쟁에서 바흐친의 주된 논점은 자기폐쇄적인 모델, 곧 '영혼의 선장'으로서의 자아라는 개인 모델에 대한 거부였다.
바흐친은 개인 심리를 한 인격체의 '내부'에 가두는 것에 반대하고 그것을 내부와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 지대에서 벌어지는 역동적인 사건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인물들은 주권적인 내부 영토를 지니지 않으며, 전적으로 언제나 경계 위에 있다." 때문에 (프로이트처럼) 문제의 해답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잘못된 것이다. 심리는 결코 한 인격체 '안'에 자리해선 안된다. 나의 뇌는 내 속에 있지만 나의 심리는 그렇지 않다.
한편, 유기체와 외부 사이의 경계선상에서 발생하는 이런 만남(접촉)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메타언어학적인 것, 곧 '기호적인' 것이다. "유기체와 외부 세계는 이 경계 영역에서 기호를 통해 만난다. 심리적 경험이라는 것은 유기체와 외부 환경과의 접촉을 기호에 의해 표현한 것이다."
자아에 대한 이런 관점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첫째로, 내부(개인)와 외부(사회)의 관계의 방향이 역전된다. 그것은 자아에 관한 서구식 모델의 근본 토대를 의문시함으로써, 자아 형성 과정에 대한 일종이 '전도된(뒤집힌)'모델을 제시한다. 이 모델을 기고츠키를 따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안에서 밖으로가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자아의 심리는 내부에서 외부로, 즉 개인에서 사회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외부에서 내부로, 그러니까 사회에서 개인으로 내부화되는 것이다.
두번째 결과는 소위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적) 관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자아의 심리를 경계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더 나아가 내적 사유 자체를 외적 언어가 내부화된 결과로 파악할 때, 무의식과 의식 간의 명백한 '질적 단절' 또한 사라진다. 무의식과 의식이 공히 언어(기호)를 통한 사고라고 한다면, 그 둘 간에는 존재론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바흐친/볼로시노프에 따르면, "무의식과 의식의 차이는 그 자체의 존재의 종류에 따른 차이, 즉 존재론적인 차이라기보다는 내용에 따른 차이, 결국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의식의 담지체로서 언어는 늘 이데올로기적 관점과 평가에 의해 침윤되어 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란 단지 '의식의 의식,' 혹은 '의식의 자기반성'(자기 이미지)에 불과하다.
정리하자면, 바흐친에게 자아 혹은 의식은 그것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반드시 필요로 하며, 더 나아가 의식과 무의식은 '기호'를 매개로 한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떻게 프로이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의 개념을 환기할 것인가? 이 질문은 1920년대의 바흐친/볼로시노프에게 가장 긴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핵심은 충동, 공포, 경악 등이 발원하는 독립적이고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생각에 저항하면서, 그 대신 더 풍부하고 변화무쌍하며 다양한 '의식'의 상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바로 이 핵심 과제를 위해 제시된 개념이 '내적 발화'이다. 내적발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행되는 외적 발화'를 말한다. 이 개념은 의식과 무의식의 '기호적' 연결을 표현하는 동시에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대신할 대안으로서 대두되었다.
일상의 이데올로기의 공식적 의식의 층위에서는 "내적 발화가 쉽게 질서화되고 자유롭게 외적 발화로 변화하며, 어떤 경우에도 외적 발화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면에, 후자, 즉 비공식적 의식 층위에서는 "내적 발화의 동기들이 형태를 갖춰 선명하고 견고해지기 힘들어져서 결국 외적 발화로 변하기 어려워지고 [......] 점차로 시들고 언어적 풍부함을 잃기 시작해 심리 내의 '이물질'로 변해간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가능하다. 공식적 의식(이데올로기)과 대립했던 동기들이 불명료한 내적 발화로 퇴화해 없어지는 대신에 전자와의 투쟁에 돌입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바흐친이 "정치적 지하활동"이라는 흥미로운 메타포로 지칭하는 이 투쟁의 결과로 공식적 이데올로기 체계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 비공식적 의식의 공식화는 '응답을 향한 기대', 곧 헤게모니의 획득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최소 두 가지의 중대한 통찰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심리적 삶을 이루는 내적 발화는 단성이 아닌 다성, 즉 '독백'이 아닌 '대화'의 과정이라는 점. 비공식적 의식 층위에서의 내적 발화에 관한 앞선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내적 발화의 과정은 '외적인 말'이 어떻게 나의 말의 맥락 속으로 '이미 언제나' 침투해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자아는 내부에 있는 특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수많은 목소리를 조합하는 특정한 방식"인 것이다.
한편, 두번째 통찰은 내부와 외부의 이런 끊임없는 교차와 상호작용이 나의 내적인 말에 실제로 깊은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외적인 말들을 대하는 나의 방식, 즉 그것에 '응답'하는 나의 (가치론적인) 태도가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바의 '내용'과 '스타일'을 형성한다. '스타일의 내부 정치(요소들이 정돈되는 방식)는 외부 정치(다른 사람의 말과 맺는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 말(담론)은 자신의 문맥과 또다른 낯선 문맥의 경계 지점에 살고 있는 것이다.'
바흐친/볼로시노프에 따르면 "외적인 언어 형태를 분석하기 위하여 언어학이 만든 모든 범주들(어휘론적, 문법적, 음성학적 범주)은 내적 발화의 분석에 적용될 수 없음이 처음부터 명백해진다. 만일 적용되려면 이 범주들이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바뀌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곧 이런 발화의 총체적인 인상들은 문법이나 논리학의 법칙이 아니라 [......] 가치 평가적인(정서적인) 대응 법칙이나 대화의 전개에 의해 결합되고 교환된다'는 것 정도이다."
가장 명백한 구조적 차이가 '통사론syntax'에 있다고 주장한다. 내적 발화에서는 맥락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는 까닭에 종종 주어가 누락되고 오직 술어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종류의 생략과 압축은 공유된 지식과 맥락을 특화할 필요가 없는 내적 발화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 한마디로 내적 발화에서 말은 훨씬 더 '경제적'으로 조직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생략과 압축이라는 이런 통사론적 특징[1]]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무의식에 관한 로트만의 앞선 지적이다. 로트만이 말하는 번역의 과정, 즉 성인의 언어 세계(대문자 텍스트)가 유아의 언어세계(소문자 텍스트)로 진입해 변형되는 과정이 수반하게 되는 불가피한 결과는 다름 아닌 '축약'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트만의 사유 속에서 바흐친의 내적 발화에 대응될 수 있는 이론적 개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론적 입장의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로트만에게서 지극히 흥미로운 '대응'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커뮤니케이션'
자기커뮤니케이션이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나 자신에게 다시 보내는 경우를 말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전송하는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과 구별하여 로트만은 이런 경우를 "나-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나 자신에게 다시 전달하는 경우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는 물론 '기억을 위한 메모'같은 것이 있다. 가령, 중요한 일정이나 계획을 미리 달력이나 수첩에 적어놓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때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내가 이미 알고 있는 특정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까 원칙상 '기억술적menmonic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자기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나에서 나로의 정보 전이가 '시간적' 이동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은 경우, 말하자면 그것이 '기억'의 기능 이외의 다른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경우들을 향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내적 상태를 좀더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즉, 생각에 집중하기 위해) 종이 위에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끼적이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이떄의 나는 새로운 정보를 첨가하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다시 곱씹고 있을 뿐이다.
로트만의 이 개념은 '반복과 차이'라는 일반적 차원의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민담류의 예술적 체계를 특징짓는 '반복의 역설'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나 자신에게 다시 전달하는 경우, 그러니까 순전한 '반복'에 해당하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은 어째서 단순한 '잉여'가 되지 않는가? 예술적 반복은 어째서 '반복'에 그치지 않는 '차이'를 낳게 되는가? '창조'
한편, 규칙적 질서를 지닌 외부적 리듬이 내적 명상을 자극하는 이런 경우를 좀더 조직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실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교한 패턴을 감상하는 것은 (마치 종이 위의 반복적인 끼적임이 그런 것처럼) 반드시 내적 명상을 위한 어떤 분위기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 성당이나 사찰의 장식적 무늬가 유독 '반복적인 패턴'을 추구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의미론적 내용을 지니지 않은 돌 더미는 자기커뮤니케이션의 주체 내부에서 내적 명상을 촉발하는 '자극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유사-리듬적 형태'로의 지향성은 확연하게 드러나는 공통 자질이다. 바로 이런 유사-리듬적 형태를 띠는 '외적 코드의 개입'을 통해 자기커뮤니케이션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통사론적 조직화가 강조되면 될수록 우리의 의미론적 연결들은 점점 더 자유롭게 연상적인 것이 된다.
나-나 텍스트는 개인적인 의미를 구축하려는 경향, 즉 개인적인 의식 속에 축적되어 있는 무질서한 연상들을 조직화하려는 경향을 띠는바, 그것은 자기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개인성personality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자기커뮤니케이션이 그 본질상 커뮤니케이션 '주체'(의 인격)의 변화와 관련된다는 이주장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이 주장에서 분명해지는바, 반복 속의 차이는 다름 아닌 주체(자아)에 걸려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바흐친의 내적 발화 개념의 핵심은 말의 '내적 대화성'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른바 '바깥의 말들,' 그러니까 수많은 관점과 접근법, 방향 및 가치들로 채색된 외부의 말들이 나의 '내부의 말' 속에서 서로 만나고 다투며 경쟁하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과정을 이해하는게 핵심이다. 그자체로 개인의 '심리적 삶'의 내용을 이룰 뿐 아니라 '인격'을 형성하는 근본 토대를 형성한다.
그것이 '소설'이라는 결정적 모델을 만나면서 몹시 새롭고 풍부한 통찰들을 내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적 발화의 개념이 함축하는 (말의) 내적 대화성이 가장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곳은 다름 아닌 소설이다. 말들이 상호작용하고 매개되고 결합되고 혼종되는 복잡한 과정을 일컫는 '대화'는 그것이 자아의 개념에 본질적인 것만큼이나 소설에도 본질적임이 판명된다. 그러니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소위 '다성악적 이념'이 구현된 실례일 뿜만 아니라 '심리학적 탐구'를 위한 최고의 형식이 된다. 바로 그런의미에서 초기의 내적 발화 개념으로부터 바흧핀이 이끌어낸 새 모델을 '소설적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내적 발화의 개념에 내포된 '사회적인 것'의 위상이 세계 모델 자체를 지향하게 될 때, 우리는 '소설적' 세계 대신에 '카니발'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카니발의 세계, 모든 공식적이고 권위적인 것들이 위협받고 허물어지는 바로 그 세계.
요컨대 바흐친에게 모든 독백을 대화로 바꿔놓는 것이 소설의 세계라면, 로트만에게 모든 반복을 창조로 변모시키는 것은 시적 원칙인 것이다. 자기 커뮤니케이션을 커뮤니케이션 주체의 '인격의 재구성'과 연결시켰던 로트만이 이제 그것을 '문화'라는 거대 체계 자체의 구성 및 작동 원리로 격상시키는 대목('예술 텍스트의 구성 법칙은 넓게 보아 문화의 구성 법칙 자체이다. 따라서 문화 자체는 다양한 발신자에 의해 전송된 메시지의 총합이자 인류라는 거대한 자아(나)에 의해 그 자신에게로 발송된 하나의 거대한 메시지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 문화는 자기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예증인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로트만은 그 자신이 곧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독특한 체계, 즉 "자기조직화하는self-organizing 체계"의 모델을 향해 나아갔다. 기호계 개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복수의 언어들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이자 동시에 그것을 위한 조건이 된다는 점, 다시 말해 자기지시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문화의 복수언어주의에 관한 심도 깊은 고찰 이후, 생의 말년에 이를수록 로트만은 점점 더 강하게 역사기호학의 문제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체계로서의 역사가 일련의 파국적 국면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갱신하는" 과정,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생성의 과정autopoiesis"에 관한 문제였다. 배후에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 '체계는 어떻게 해서 잉여성과 동어 반복을 극복하고 새롭게 갱신되는가'라는 물음.
[1] 문장을 기본 대상으로 하여 문장의 구조나 기능, 문장의 구성 요소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언어학의 한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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