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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스템 1800.1900_프리드리히 키틀러_윤원화 역_문학동네

by jemandniemand 2020. 3. 10.

목차

I 1800
학자의 비극. 무대의 서막
파우스트식 도서 사용법 · 해석학으로서의 성서 번역 · 시와 철학 · 성서를 대신한 교양국가 · 시, 악마의 계약, 국가공무
어머니의 입
1800년경의 읽기 공부
어머니들을 위한 기초독본 · 박애주의자들의 알파벳 학습 · 슈테파니의 음성학적 읽기 교습법 · 표준 독일어 · 헤르더의 언어인류학과 ‘아아’ 하는 한숨 · 1800년경 음악과 언어의 기본요소들 · 기초독본이라는 언어의 시작 · 어머니의 읽기 교육을 기억할 가능성
모성과 공무원 조직
어머니들을 위한 페스탈로치의 교육학 · 국가적 모성 · 교사의 공무원화 · 고등교육제도에서의 남성과 여성 · 철학과 여성들에 대한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생각
언어 채널들
번역 불가능성
일반적 등가물의 의미 · 노발리스. 번역으로서의 학문과 시 · 독자 안톤 라이저
「황금 단지」
언어의 시작으로서의 구술적 입문의식 · 아버지가 지도하는 새로운 글쓰기 교육 · 낭만주의의 원형적 글로서의 자연 · 공무원 신화와 도서관 환상 · 알파벳 공부의 에로티시즘 · 무의식의 시인과 미친 공무원 · 1800년경의 시인?공무원 이중생활
저자들, 독자들, 저자들
글쓰기의 도취와 관념고정 · 감각적 미디어의 대체물로서의 시 · 역사적으로 망각된 텍스트들이 시스템에 통합되다 · 저자 기능의 성립
건배의 말
여성 독자의 기능과……
1800년경 익명의 여성 문필가들 · 베티나 브렌타노와 원형적 저자 괴테 · 괴테의 타소, 여성성의 시인 · 시적인 사랑 고백 · 호프만의 히스테리적 여성 독자 · 저자의 증식과 독서의 규제 · 여성들의 읽기 중독 · 시 독본
……신의 왕국
니트함머의 괴테 독본 · 고등교육제도에서의 독일 시문학 · 철학과 대학개혁 · 시인과 사상가의 경쟁 · 시적 정신의 현상학 · 말하기, 읽기, 글쓰기에 대한 헤겔의 생각 · 시인들, 사상가들, 여성들

II 1900
니체. 비극의 시작
고전에 대한 니체의 결산평가 · 자동사적 글쓰기의 원초적 장면 · 1900년 무렵의 말 만드는 사람 · 세 가지 미디어: 언어, 음악, 영화 · 니체가 제시하는 기표의 논리 · 시력 상실과 타자기 · 명령하는 니체와 그의 여성 비서들 · 여성들의 귀를 위한 철학
위대한 랄룰라
정신물리학
에빙하우스의 기억 실험 · 1900년경 음악과 언어의 기본요소들 · 모르겐슈테른의 우연적 서정시 · 문화기술과 실어증 연구 · 실어증 환자의 문학 · 청력과 압운 실험 · 타키스토스코프를 이용한 읽기 연구 · 거트루드 스타인의 실험적 자동기술법
기술적 미디어
축음기의 기원들 · 축음기 시와 과학수사 · 축음기 실험에서의 사고비약 · 벤과 치헨의 사고비약 · 벤의 「여행」: 말에서 영화로 · 기술적 미디어와 대중문학 · 자족적 미디어로서의 엘리트문학 · 문자의 정신물리학 · 모르겐슈테른의 타이포그래피 시 · 슈테판 게오르게 서체
리버스 퍼즐
번역 불가능성과 미디어 치환
게오르게의 은밀한 말 저장고 · 개별 미디어의 분석과 조립
정신분석과 그 이면
프로이트의 꿈 해석 기술 · 정신분석 대 영화 · 프로이트의 정신물리학적 전제들 · 분석용 침상 위의 문자들 · 축음기이자 문필가로서의 프로이트 · 문학적 텍스트의 정신분석 · 정신질환적 텍스트의 정신분석 · 슈레버, 프로이트, 플레히지히 · 슈레버를 둘러싼 “기록시스템” · 교양의 종언과 무의미의 쾌락
광기의 시물라크룸
문학과 정신의학 · 문필가와 정신분석가의 경쟁 · 뇌 신경망의 텍스트화 · 릴케의 「근원적 음향」에 나타난 두개골의 음향 기록 ·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 · 글쓰는 문맹자 · 실시간 분석과 재현 불가능성 · 예술교육운동의 자유작문교육 · 우연의 문필가가 정신의 공무원을 대체하다 · 우연의 독자를 위한 우연의 저장장치 · 익명의 문필가 · 역사적으로 망각된 여성 필자들이 시스템에 통합되다
퀸의 희생
『미래의 이브』 · 정신분석과 여성들 · 여성들과 타자기 · 스토커의 『드라큘라』: 타자기에 기초한 흡혈귀 소설 · 엘리트문학과 대중문학의 여성 타자수들 · 카프카의 사랑: 기술적 미디어 · 예술의 경지

후기

참고문헌
프리드리히 키틀러 연보
해설: 필자로서의 키틀러
인명 찾아보기

 


 

(477~)

정신분석과 그 이면

미디어 치환은 농담, 신비주의, 문화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적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새로운 학문의 모범이 될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 표지에 당당하고 성급하게 새로운 세기의 숫자 0을 적어넣으면서 미디어 치환에 기초한 새로운 학문을 선포한다. 

프로이트는 헤겔의 주장보다는 (그는 이 철학자의 말을 간접 인용하고 넘어가고) 꿈이 "숨은 의미"를 암시한다는 대중적 믿음을 선호한다. 그런데 대중적 꿈 해석은 두 가지 보충적 방식에 의지해서 여전히 의미를 번역하려고 한다. 

두 기술은 [꿈을 연속적 전체로 간주하는] 아날로그 방식이든 [꿈을 개별 요소들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디지털 방식이든 간에 꿈과 말이라는 두 미디어의 요소들이 서로 유사하거나 외연이 일치한다고 전제한다. 

각각의 퍼즐을 짜맞추다보면, 무의미한 것이 아름답고 함축적인 시구가 될 수도 있다. 꿈이란 바로 이런 퍼즐이다. 

모든 번역의 궁극적 지시 대상인 자연의 알파벳, 즉 원형적 글이 존재하지 않기에, 리버스 퍼즐을 번역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긋남을 극복하려면 부득이 새로운 학문을 정립해야 한다. 외현적인 꿈-내용을 잠재적인 꿈-사고로 치환하려면 먼저 양쪽의 미디어가 각각 어떤 요소의 집합과 결합의 규약(결합법칙)으로 이루어졌는지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꿈의 해석>은 제목 그대로 꿈을 해석하기 위해 꿈의 전체적 현상을 무시한다. 미디어 치환이 일어나면 원래의 미디어는 해체되어 없어진다. 

이미지를 말로 옮기는 것은 안젤무스와 호프만에게 쾌락을 주었던 "내면의 눈"을 칼로 도려내는 것과 같다. 

"말이 부서진 곳에는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히스테리적인 이미지의 흐름이 말로 치환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최후의 안식을 맞이한 유령의 이름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그 이름을 짐작하게 하는 정황증거들이 있다. 

 

1800년경에는 여성들을 히스테리에 빠뜨리는 것을 두고 시의 내용을 즐겁고 환각적인 기의로 번역하는 독서법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러니 분석용 침상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침전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침전물은 여성 독자 기능이 오작동하게 된 시점에서 일상적인 것을 문자 그대로 독해하는 법을 익힌다는 당대의 새로운 목적에 종속된다. 정신분석도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를 엄격히 구별하던 1900년경의 "분기점"에 섰을 것이다.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은 여성, 어린이, 광인들에게 문자화된 암호로 이루어진 엘리트적 무의식을 새겨넣기 위해 그들에게서 바로 그 무의식을 발견한다. 

"영화의 재현은 여러모로 꿈의 기술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시인이 명확한 말로 포착하지 못하는 심리적 정황들과 관계들까지 명확하고 자명한 시각언어로 표현한다."영화 이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정립하는 수사학적-문자적 영역에서 꿈 이미지의 영화적-외현적 상징성을 제거한다. 

 

생철학은 관람자의 눈앞에 교묘하게 생산되는 연속성의 환영을 지키기 위해 분리ㅗ아 해체라는 작동원리를 은폐하는 일종의 영화관으로 탈바꿈한다. 반면 프로이트는 마치 타키스토스코프 실험을 하는 과학자처럼, 환영적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 직접 작동시키는 꿈-작업의 메커니즘에 집중한다. 

 

푸코는 1900년 전후로 발생한 언어의 회귀가 초월론적 지식이 남긴 최후의 흔적이었는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었는가를 두고 놀라울 정도로 불확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단지 그는 정신분석, 인종학, 구조주의 언어학 모두가, 내적 성찰의 관점에서 '이상적 인간'에 접근하는 정신과학의 접근법이 외래적 언어에 가로막히는 지점에 놓인다고 진단할 뿐이다. 푸코나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담론의 규약을 철학적 사고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에만 한정하고 기술적 차원을 묵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00년 전후에는 정보기술의 혁신으로 기록시스템이 초월론적 지식과 결별해서 독립할 수 있게 되며,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정신분석도 정신과학적 기획과 분리된다. 

통상적인 접근과는 다른 방식으로 담론의 기능들을 분리한다는 데 의의. 

그리고 1895년에 발표한 <심리학 연구계획>에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분리된 기능들을 엄격하게 기능적 위상 관계에 의거하여 지형학적 모델로 구조화한다. 영혼을 일종의 블랙박스로 모형화하는 프로이트의 <심리학 연구계획>은 그 자체가 당대 심리학 모델의 모범적인 사례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가설적인 경로들, 방출과 집중, 그리고 (당연히 불연속적인) 신경세포들을 당대의 대뇌생리학적 진술들과 비교해보라. 

프로이트가 구축한 심리적 장치는 최근 들어 구조주의에 관한 새로운 철학적 성찰에도 영감을 주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그저 당대의 과학적 표준을 준수한 결과일 뿐이다.  

프로이트는 의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평균적 장애패턴을 바탕으로 뇌 기능과 언어시스템을 역추론하기 위해 통계적으로 정리해놓은 방대한 무의미의 보고에서 출발한다.

 

융도 이와 유사한 전환의 과정을 거쳐 정신분석으로 진입한다. 처음에 융은 블로일러가 이끄는 부르크후ㅚㄹ츨리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크레펠린, 치헨, 슈트란스키의 연상 및 사고비약 실험을 통계적으로 확장하는 연구를 시작한다. 하지만 제한된 수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다보니 논문이 거듭될 수록 통계 연구는 줄고 개별 사례 분석이 늘어난다. 융은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전확; 형태의 고문기구가 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정신분석이 언어시스템에서 개별 발화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개인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래 해부학적 언어시스템의 논거로서 고안된 "규칙 없는 말실수는 있을 수 없다"라는 명제를 무의식이라는 특이한 시스템의 논거로 삼는 것뿐이다. 

 

무언가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닳게 만든다는 것이다. 산업적으로 보증된 유사성이 손상되면서 개체의 특이성이 나온다. 그리고 이 특이성이 경미한 손상에 그친다면, 각각의 병력 또는 사례연구는 다시 공시적 질서로 포섭되어 과학수사 전문가 홈스나 정신분석가 프로이트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부르크횔츨리 정신병원 원장 오이겐 블로일러가 말했듯이, 과학수사는 "확실히 전도유망하다." 필체, "심지어 신발이 닳는 방식만 봐도 한 사람 전체를 추론"할 수 있다[1].  분석가는 회상의 "진실성"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상적 "의미"를 걸고 넘어진다. 만일 진실성을 의심했다면, 프로이트는 읽기를 연구하면서 생리학자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미보다 문자에, 문자보다 문자 간 차이에 더 관심이 있기에, 언어의 간극을 다시 발화의 간극으로 치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래야만 하는 다른 무언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는 것. -환유/은유?

 

구츠만은 무의미한 말을 들려주었을 때 피험자가 자동으로 자기도 모르게 의미 있는 말로 바꿔 듣거나 바꿔쓰는 "측음기 실험"을 바탕으로 "어떤 가설적인 사고의 추이를 밝히는" 데까지 나아간다. 

프로이트의 담론은 개인의 곤경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무의미한 말들을 철저하게 기록하는 기록시스템을 탐구하여 그에 내재된 기표의 논리를 사람들에게 각인하고자 한다. 

 

프로이트가 충격적인 것은 만사를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환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1800년경에 이른바 '세계'를 꿰뚫었던 정신과 자연의 유희를 연상시키는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을 '극히 명징하고 촉각적인 문자유희의 장'으로 되돌리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수집한 환자 병력들을 영혼의 낭만주의가 문자의 물질성에 자리를 내주었음을 보여준다. 

 

'의사는 정보를 제공하는 환자의 무의식을 다룰 때 자신의 무의식을 수용기관처럼 활용해야 한다. 전화 수신기가 송신기에 맞게 설정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피분석자에게 맞추어야 한다. 수신기가 음파에 의해 유발된 전기적 파동을 다시 음파로 변환하듯이, 의사의 무의식은 자신에게 보고되는 무의식의 파생물에서 출발하여 환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결정한 무의식의 작용을 재구성할 수 있다.' 

 

글없이 글을 쓴다는 역설은 기술적 미디어로만 해결된다. 프로이트는 인지적 주체로서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미디어로 치환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귀를 전화수신기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하는 말로, 인간은 오로지 [소리를 소리 자체로] 듣지 않기 위해 (그래서 모든 것을 의미로 변형하기 위해) 귀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정신분석이 "여태껏 지각된 것의 광범위한 흐름 속에서 눈에 띄지 않은 채 함께 유동하던" 말실수들을 "분리하고 분석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면, 영화는 "광학적 지각세계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통각을 심화시켰다"라고 하면서 두 분야를 동기화하였다. 그러나 그 경계는 각각생리학적 차원에서는 결코 충분히 정확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영화와 축음기는 무의식의 무의식으로 남는다. 이들과 함께 태어난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은 이미지의 연쇄에 원초적 억압으로 대항하고, 음향의 연쇄에 기표의 사슬로 대응한다. 프로이트의 꿈이자 다른 이들의 악몽인 정신분석의 정신화학자가 실현되면, 그때는 이 억압 역시 억압될 것이다

 

확실히 1900년식 기록시스템은 거트루드 스타인의 불명확한 신탁만큼 빠져나오기 어렵고 비인간적이지만, 그렇게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의미의 명령으로부터 빠져나올 기회를 열어젖힌다

 

'신은 세계질서에 따라 규정된 영혼들의 존재 조건에 의거하여 지속적인 향락을 요구한다. 나의 의무는 ...... 영혼의 쾌락을 가능한 한 풍부하게 발전시킨 형태로 신에게 이 향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때 감각적 향유의 어떤 부분이 내게도 떨어지는데, ...' 

의미가 중단된 곳에서 향락이 시작된다. 

 

철두철미한 데이터 수집시스템이 있으니 더이상 사람들에게 기계식 저장장치를 심어서 영혼을 형성할 필요가 없다. 전직 판사회 의장은 동물처럼 울부짖고 망각과 사고비약에 시달리지만, 그럼으로써 관료적 존엄 또는 인간적 존엄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유는 1900년 전후로 주체의 새로운 정의가 된다. 무의식의 주체는 문자 그대로 폐기물이다. (!!!) (내가 분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분석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분석의 주체가 될 수있다는 자유?)

 

자신을 소진시킨 것을 소진시킨다. 

정신이 완전히 결여된 채로 기록의 임무에 충실한 천상의 존재들처럼, 슈레버는 특색 없는 기계적 방식으로 플레히지히의 신경생리학 또는 헛소리를 종이에 옮긴다.

 

 

 

[1] 연극치료 진단평가 기준과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