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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texte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 김병화 역, 문학동네, 2014

by jemandniemand 2020. 4. 29.

목차

서문 5

1 그곳에 있기: 인류학과 글쓰기의 현장 9
2 텍스트 속의 세계: 『슬픈 열대』를 읽는 방법 37
3 슬라이드 쇼: 에번스프리처드의 아프리카 슬라이드 65
4 목격하는 나: 말리노프스키의 후예들 93
5 우리/우리 아닌 자: 베네딕트의 여행 127
6 이곳에 있기: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삶인가? 161

주 185
인명 소개 195
클리퍼드 기어츠 연보 209
옮긴이의 말 213
찾아보기 221

 


진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는 인류학자의 능력은 정확한 시선이나 개념의 정밀성 여부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그보다는 그들이 실제로 다른 생활 세계에 침투해 보았고(혹은 침투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실제 '그곳에 있어본' 결과라고 믿게 만드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글쓰기는 이러한 무대 뒤에서 일어난 경이로움을 우리가 이해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인류학적 글쓰기의 참여는 '저자author'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다른 담론 영역에서 저자라는 개념은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저자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으레 지식을 그 배후에 두고 있는 우리의 솔직담백한 인류학 분야에서, 말하는 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무척 중요하다. 

나의 글은 미셸 푸코의 유명한 논문 <저자란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인류학은 분명 '과학적' 담론보다는 '문학적' 담론 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인류학 저서와 논문뿐 아니라, 사유 체계에도 개인의 이름이 붙는다. 

두 가지 질문 혹은 양면적인 질문 하나가 제기될 수 있다. (1) '저자 기능'은 어떤 식으로 텍스트에 뚜렷하게 드러나는가? (2) 저자가 저술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민족지 문헌이 어떻게 '저술되는가' 하는 물음을 주관성에 대한 염려로 묻어버리는 바람에 여러 가지 불행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중에는 사회과학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극단적인 경험주의도 있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그 질문이 암시하는 중의성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의식해왔음에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기가 지독히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인류학자들은 민족지 서술과 관련된 중요한 방법론적 사안들이 지식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관찰하는 자와 관찰 대상의 관계(친밀한 관계)를 통제할 수 있다면 저자와 텍스트 간의 관계(서명)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친밀한 관점과 냉정한 평가를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텍스트에서 연구자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애당초 그런 관점을 취해 평가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과제인 것이다. 

민족지가 얼마나 자아/텍스트 간보다는 자아/타자 간 협상의 복잡성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되는지를 인지하는 것은 물론 민족지 자체를 보아야 가능하다. 또 그 도전과 곤혹스러움은 표지를 넘길 때부터 명백하게 느껴지므로, 민족지를 읽을 때 눈여겨 보아야 할 지점은 다름 아닌 시작 부분이다. 

 

퍼스의 사례 - 이 글을 보면 퍼스가 말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밀한 묘사, 디킨스적인 활기와 콘래드적인 운명론을 열거한 서술은 그다음 500 쪽에 이르는, 사회적 관습에 대한 강한 객관적 서술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하도록 이끈다. '이 일이 내게 일어났다'라는 강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텍스트 전체에 걸쳐 초조한 듯 서명하고 또 서명한다. 퍼스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현지조사 방법이라는 기준에 입각하여 자신이 쓴 내용과 자신의 관계를 두고 분투한다. - 전기적 경험이라는 재료로 과학적 텍스트를 만들어내야 하는 저자가 느끼는 곤혹스러움. 

 

'인류학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을 포함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거리두기는 타자를 원시적이고 기괴하며 이국적인 존재로만 주목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친숙한 '우리'와 이국적인 '그들'의 간극은 타자를 의미있게 이해하는 데 굉장한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면 타자의 세계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는 수밖에 없다. 자아와 타자의 거리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욕구는 현지조사에서 싹튼 것이다. 나는 죽음이 타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내 친구들과 친척들도 죽고 나도 죽을 것이며, 죽음은 누구에게나, 자아와 타자에게 똑같이 찾아오는 것이다.'

민족지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그곳에 있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만약 우리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자기들이 본 것을 우리도 보고, 자기들이 느낀 것을 우리도 느끼며, 자기들이 내린 결론을 우리도 내릴 것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인류학에서 무척 지루한 책은 있을지 몰라도 익명의 중얼거림은 거의 없다

 

'저자'와 '작가'의 구분, 혹은 담론성의 창시자와 특정 텍스트의 제작자라는 푸코식의 구분이 본질적 가치에 따른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저자와 작가>라는 논문을 '저자-작가'라는 혼외자녀 같은 유형이 우리 시대 문학을 특징짓는다고 주장한다. 이 '저자-작가'는 마법같은 언어적 구조물을 창조하고 싶은 욕구, '언어의 극장'에 입장하고 싶은 욕구, 사실과 이념을 소통하게 하고 정보를 상품화하고 싶은 욕구, 이 욕망 저 욕망에 대한 발작적인 탐닉 사이에 끼여 있는 전문 지식인이다. 

 

참여관찰을 하는 바르트적인 '저자'이자 '나는 그곳에 있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중 하나였고 그들의 목소리로 말했다'라는 식의 민족지 글쓰기 전통을 개척한 그는, 민족지를 기묘한 자기 내부의 문제, 자기시험과 자기변형에 대한 의심으로 만들었고, 글쓰기를 자기폭로의 한 형태로 만들었다

저자로서 '그곳에 있기'는 책장마다 저자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어떤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그곳에 있기'를 성취하기 위한 힘겨운 묘책이라 할 수 있다. 

 

2 텍스트속의 세계;  『슬픈 열대』를 읽는 방법

어쨌든 나는 호의적이고 한결같은 시각으로 바르트식의 '저자-작가'인 레비스트로스에게 접근하고자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독자가 자신의 텍스트를 관통하여 그 너머를 바라보길 원하지 않는다. 그는 독자들이 자기 텍스트를 바라보길 원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전 저작을 다루는 통상적인 두 가지 접근법 가운데 더 일반적인 것, 역사주의적인 서구인들에게 아주 간단하고 친숙한 접근법은, 전체를 선적인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그런 접근법을 더 선전한 것 같은데, 본인이 모든 형태의 역사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기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정체를 숨기기 위한 처신이 아닐까 싶다. 

이 접근법은 <야생의 사고>에서 암호화되고 체계화되어, 마르크스주의나 지질학, 정신분석학처럼 진정한 과학으로 전향한다. 

 

생각과 목표가 확고한 레비스트로스는 앞길을 가로막는 학술적 이데올로기들을 하나씩 물리친다. <친족의 기본 구조>는 위너, 레드클리프브라운, 머독의 친족 논쟁에 개입하여, 논쟁의 전체 축을 이동시켜버린다. <오늘날의 토테미즘>은 뒤르켐의 이론과 그것을 통속화시킨 레드클리프브라운의 논의를 뒤집어버린다. <야생의 사고>는 사르트르, 인식론, 역사의 이념과 논쟁을 벌인다. <신화학>은 임기응변에 능한 재주꾼처럼 보아스, 뮐러, 프레이즈의 주제 목록을 해체하고 재조직한다. 오스트레일리아-동남아시아 연구는 마르셀모스(여성의 증여를 통해 소통하는 남성들)식으로 작업한다. <야생의 사고>에서는 트랜스-마르크스주의자와 고등언어학자(세계의 환상과 동물 환유)의 방식을 고수했고, <신화학>은 탐미주의와 계몽주의적 백과사전주의의 혼합물이다. 

<슬픈열대>는 단순한 오락처럼 보이며, 약간은 당혹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선적인 관점에서는 이 저술은 지적 순수성을 향해가는 긴 행군 도중의 서알 혹은 다소 무의미한 휴식에 지나지 않고, 순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무시해버리는 것이 최선인 개인적인 표출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에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관점의 진전에 따라 선적으로 조직되지도 않았고, 총량적, 즉 단일하게 고정된 하나의 견해가 불연속적으로 재형성되는 연쇄로서 조직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그의 저술은 오히려 원심적으로 조직되어 왔다

서로 다른 종류의 텍스트가 하나하나 덧씌워져 무아레 같은 패턴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덧씌워진'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가 <슬픈 열대>에서 발견하는 것은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표면에서 심층을 향해 배치되어 있는 텍스트가 아니며, 한층 한층 벗겨나가면서 더 깊이 파고들어가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 속에 숨겨진 또다른 텍스트 따위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동시에 발생해서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같은 층위에 존재하면서 상호간섭하는 텍스트이다. 

 이 책은 사실상 '구체의 사고'라는 레비스트로스의 만화경 이미지의 닮은꼴이다. 즉 로만 야콥슨이 유사성의 평면이라 부른 것을 따라 연속적 요소들이 계열적 체계를 이루며 수직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 요소들이 근접성의 평면을 따라 통사적으로 결합되어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 <슬픈 열대>는 러시아/체코 형식주의 시의 이상적 전형이다. 의미는 계열적인 대체물의 아날로그 축인 야콥슨 식의 '은유'를, 그 통사적 조합인 디지털 축 '환유'에 투사함으로써 구축된다. 좀더 가볍고 무난한 언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다면적 텍스트의 걸작으로, 여러 권의 책이 한꺼번에 그 속에 비좁게 끼어 서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우선, 그 유명한 첫 문장에서 반어적으로 또 자기성찰적으로 부정되고 있기는 해도, 이 책은 매우 분간하기 쉬운 장르인 기행문이다. 

둘째, 아무리 기묘한 모습을 띠고 있다고 해도 이 책은 민족지이다. 그런 텍스트의 특성상, 지독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여행 기록과 달리 민족지 기록은 하나의 논지를 펴고 있다. 그 논이는 사실 레비스트로스가 사반세기 넘게 추구해온 것으로서, "한 민족의 관습은 항상 특정한 양식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그것들이 체계를 형성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셋째, 이 책은 여행 기록이며 민족지 기록일 뿐 아니라 철학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루소가 말한 '발생기 사회' 모델을 다시 존경받는 위치로 복권시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것은 <슬픈 열대>에 실린 네번째 종류의 텍스트, 개혁주의자의 글로 이어진다. 모든 급진적인 저자의 글을 통틀어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만큼 파괴적인 통렬함과 위력을 가진 작품은 거의 없었다. 개혁주의자의 글인 <슬픈 열대>는 모럴리스트의 분노라기보다는 미적 혐오감의 폭발이다. 그와 사르트르를 갈라놓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사르트르는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보다 지배당하는 상황을 더 걱정했다. 레비스트로스의 깊은 사회적 혐오감은 스위프트의 경우처럼 신체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에 대한 역겨움보다 더 깊은 데서 생겨난 것 같다. 그의 급진주의는 정치적이지 않다. 그것은 감각적이다. 

다섯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슬픈 열대>는 상징주의적 관점을 원시문화에 적용한, 다분히 의도적인 상징주의 문학 텍스트이다. 남아프리카에 간 말라르메라고나 할까. 레비스트로스가 스스로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특히 프루스트가 만든 문학적 전통 속에 자리잡고자 한다는 사실은, 내가 아는 한 <슬픈 열대>에서 결코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의 글쓰기 방식과 소재,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발언으로 보아 명백하다. 즉 그는 암호를 해독한다. 

 

전혀 놀랄 일도 아니지만,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신화이다. 텍스트 유형들 간의 모든 통사론적이고 환유적인 밀고 당기기가 만들어내는 이 책을 아우르는 형식은 다름아닌 성배 추적 이야기다. 친숙하고 지루하고 유난한 방식으로 위협하는 이쪽 기슭을 떠나, 온갖 환영과 기묘한 계시로 가득차 있고 더 어두운 다른 세계를 모험하며 돌아다니는 이야기. 물론 추적자로서의 인류학자라는 신화 역시 다른 것들과 나란히 병존하는 또 하나의 환유적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체계적으로 구축한 작업의 요체는 <슬픈 열대>의 텍스트를 저마다 굉장히 다양한 통사론적 관계 속에서 서로서로 연결하고 다시 연결하며 또다시 연결하는 긴 발언으로 보인다.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작품과 생애, 텍스트 구축 등에 관한 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주제는 <슬픈 열대>에서 발전시킨 '그곳에 있기'에 대한 매우 특징적인 표현, 그리고 지시하는 텍스트와 지시된 세계, 즉 그 텍스트에서 전개된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똑같이 특징적인, 사실상 도착적인 재현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그곳에 있기'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말그대로 사기 아니면 공허한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그는 <슬픈 열대>의 앞부분에서, 경험과 실재 사이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 둘 사이에 연속성은 없다. ...... 실재에 도달하려면 먼저 경험을 거부해야 한다. 설사 나중에 객관적 종합 속에서 그것을 재통합할지라도 말이다. 감상적인 생각은 객관적 종합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 우리의 임무는 존재를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 자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낯설게  보이는 생활의 기초를 꿰뚫어보는 것,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곳에 있기'는 그들 속에 개인적으로 투입되는 방식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을 달성하려면 오로지 그들의 문화적 생산물(신화, 예술, 의례, 또는 그 무엇이든), 즉 낯설게 보이는 독특한 삶의 면모를 보편적으로 해석해 직접성을 해체시킴으로써, 그 낯섦을 사라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 원격접사란 거리를 둘 때 오히려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그의 책은 삶을 그려내는 것도, 삶을 환기하는 것도 아니며, 번역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삶이 어떤 식으로든 남겨놓은 재료들을 배치하고 재배치하여 그에 상응하는 공식적 체계로 정비한다. 말하자면 그의 책은 재규어, 정액, 썩어가는 고기를 반대, 도치, 동형구조로 변형시키는, 유리로 둘러싸인 자가봉합적 담론인 듯하다. 

 

 

4 목격하는 나: 말리노프스키의 후예들

말하자면 그 연구는 다른 어딘가에 있는 패러다임을 향해가는 패러다임 여행이었다. <일기>는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말리노프스키 자신에 대한 내용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중 많은 부분이 신낭만주의적인 상투어로 쓰여 있으며, 다른 유명한 '고백록'들이 그렇듯이 겉보기만큼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것이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그곳에 있기'에 대한 내용 때문이다. 

이국적인 것은 ... 그런 즉각성 속에서 자신을 잃고, 어쩌면 영혼까지 잃어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전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문제는, 민족지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토착생활 외에도 우리가 풍덩 뛰어들어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핵심은 '그곳'에서 겪은 것을 '이곳'에서 말하는 것으로 옮겨오는 경로의 문제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문제다. 약간 기교를 부려 딱딱하게 표현하면, 이 문제는 '목격하는 나' 접근법을 취해 문화를 해석하는 모두에게 발생한다. 사회적 기호나 분석의 힘이 아닌 감수성을 민족지의 중심부에 두는 것은, 스스로에게 텍스트 구축에 대한 독특한 성격의 문제를 내는 것이다. 즉 문제는 당신 개인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설명에 신뢰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가장 분명한 한 가지는 그가 아마 자신의 텍스트 속에서 - 자신이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질지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고집스럽고 혼란스러워하고 묘하게 초조한 채로 - 양쪽 모두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말리노프스키가 '내면을 들여다볼 때'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외부에' 어떤 존재로 드러내고 싶은지를 모른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두가지 모두를 확실히 알고 있다. ...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현지조사 기술이나 사회이론에 관한 것도, 신성시된 대상이나 '사회적 실재'에 대한 것도 아닌, 인류학의 '담론 문제'(어떻게 권위 있는 설명을 쓰는가)를 둘러싼 인식일지도 모른다. 말리노브스키를 계승한 인류학자들은 사람들이 가정했던 것처럼 연구방법인 '참여관찰'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문학적 딜레마인 '참여묘사'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연구 과정을 연구 결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사회, 문화, 생활방식 또는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을 동원하여, 더불어 구성원들,  전달자, 대표자 또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활용하여 민족지를 쓰겠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는 '목격하는 저자인 나'가 '그들이 그려내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말리노프스키 본인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우리는 롤랑 바르트가 "일기병"이라 부른 것이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지, 궁금해진다. 바르트는 자문한다.

'내가 출판할 목적으로 일기를 쓴다면? 일기를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삼아온 내밀한 일기의 목적은......모두 이득 및 '솔직함'의 영예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 그릇된 믿음에 대한 사르트르식 비판,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모두 '고백'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솔직함이란 그저 이급의 이미지 저장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