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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texte

From Ritual to Theater, Victor Turner, 1982

by jemandniemand 2020. 4. 17.

The Ritual Process, 1969

 

I want rather to discuss some of the types of socio-cultural processes and settings in which new symbols, verbal and non-verbal, tend to be generated. 

(1) Syntactics: The formal relationships of signs and symbols to one another apart from their users or external reference; the organization and relationship of groups, phrases, clauses, sentences, and sentence structure.

(2) Semantics: The relationship of signs and symbols to the things to which they refer, that is, their referential meaning. 

(3) Pragmatics: The relations of signs and symbols with their users.

 

Comparative symbology is not directly concerned with the technical aspects of linguistics, and has much to do with so many kinds of non-verbal symbols in ritual and art, though admittedly all cultural languages have important linguistic components, relays, or 'signifieds'. 제의와 예술 속에 있는 많은 종류의 비언어적 상징들과 더 많이 관련된다. 비교상징학의 데이터는 주로 문화적 장르들 혹은 문화표현 체계들로부터 이끌어내어진다. These include both oral and literate genres, and one may reckon among them activities combining verbal and nonverbal symbolic actions, such as ritual and drama, as well as narrative genres, such as myth, epic, ballad, the novel and ideological systems. 

But comparative symbology비교상징학 does more than merely investigate cultural genres in abstraction from human social activity. I came to see performances of ritual as distinct phases in the social processes whereby groups became adjusted to internal changes (whether brought about by personal or factional dissensions and conflicts of norms or by technical or organizational innovations), and adapted to their external environment (social and cultural, as well as physical and biotic). 제의적 상징은 사회적 행동 안에 들어있는 중요 인자, 인간의 활동 영역 안에 있는 긍정적인 힘이 된다[From this standpoint the ritual symbol becomes a factor in social action, a positive force in an activity field]. Symbols, too are crucially involved in situations of sotietal change - the symbol becomes associated with human interests, purposes, ends and means, aspirations and ideals, individual and collective, whether these are explicitly formulated or have to be inferred from the observed behavior. 나는 애초부터 상징을, 시간을 뛰어넘고 형식을 바꾸면서 의미를 버리고 모으는, 사회 문화적인 역동적 체계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단지 논리적 인지 체계 속에 있는 용어로만 볼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틀림없이, 철학적 신학적 형식논리적 체계와 같은 복합적 사회의 전문화된 장르들 속에서는, 그런 장르들의 해체로부터 나오는 상징들과 기호들은, 그런 '대수적' 혹은 논리적 자질을 획득하고 '이항대립적인' 관계들 속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으며, 탁월한 전문가들의 '매개자'로서의 인지적 활동에 의해 그 기호들의 성질이 변성될 수도 있다. 

'les symboles sauvages야생적 상징들' such as cultural refreshment genres, of poetry, drama, and painting, of post-industrial society, have the character of dynamic semantic systems, gaining and losing meanings as they travel through a single rite or work of art, let alone through centuries of performance, and are aimed at producing effects on the psychological states and behavior of those exposed to them or obliged to use them for their communication with other human beings. 사회적 문맥 속에서 상징들의 의미는 항상 정서적, 의지적 차원을 갖고 있다. 또 사람들은 제의나 예술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으며, 다른 인간 부족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도 그런 제의나 예술작품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들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와 행위에 어떤 효과를 미칠 수밖에 없다. 

This is perhaps why I have often focused on the study of individual symbols, on their semantic fields and processual fate as they move through the scenario of a specific ritual performance. 이러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 곧 각 상징의 전 세트에 대한 '형식적 분석'은, 상징을 선험적으로 하나의 체계 혹은 '형태gestalt'인 것으로 상정하고, 닫혀 있고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며, 공시적인 '총체corpus'혹은 제한된 자료들의 집적으로 취급한다. 또, 이런 분석은, 주어진 상징의 형식적 특징과 관계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그 상징이 가지는 의미의 자질들로부터 다만 그것을 어떤 이항대립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특정한 지시적 명칭만을 선택하는 경향, 즉 제산된 인지적 건축체계 내에서 서로 관련되는 축조 벽돌만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항성과 자의성이 이럴 경우에 서로 결합되는 경향이 있고, 이것들 둘 다 '기표들'의 무시간적 세계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취급방법은, 가끔은 매혹적이고 우아해 보이기도 하는, 우리 인지 능력을 전율시키는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의 취급 방법은, 우리 사회생활의 독특한 환경과 컨텍스트인 욕망과 느낌으로 어두워지기도 하고 반짝이기도 하는, 사회생활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삶의 복합성으로부터, 그 상징의 전 세트를 이탈시켜버리고, 그것에다가 이원적인 죽음의 힘rigor morti을 부여해 버리게 된다. Binariness and arbitrariness tend to go together, and both are in the atemporal world of "signifiers". Such a treatment, while often seductively elegant removes the total set of symbols from the complex, continuously changing social life, murky or glinting with desire and feeling, which is its distinctive milieu and context, and imparts to it a dualistic rigor mortis. 

본질적으로 상징들은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기표'와 '기의'로서, 다양한 가변성 속에 있는 것이다. 또 그 다양한 가변성은, 그 가변성을 특정한 여러 사례들 안에서 극복하고 축소함으로써, 그리고 동시대의 사물들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데 장애가 되는 그 이전에 자명했던 원리들을 문제삼음으로써,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무질서를 창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그 상징들을 선별하여 사용하는 인간들의 가변성, 반드시 살아있는 의식적, 정서적, 의지적 인간들의 가변성인 것이다. 

 

비교상징학은 바로, 이 '노는 능력'을 보존하고자 하며, 상징을 그것의 움직임 속에서 포착하려고 하며, 상징이 가지고 있는 형식과 의미의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가지고 '놀고자 한다.' 비교상징학은, 사회적으로 작용 반작용을 하고 초월적 상호적 작용을 하면서 '살아있는 인간들'에 의해 사용되는 상징들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장에다가 그 상징들을 '맥락화'함으로써, 이 작업을 수행한다. '상징적인 것'이 화용론적인 리얼리티에 대립될 때일지라도, 그것은 즉시 그 대립되는 것과 접촉하고, 대립되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 대립되는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긍정적인 비유에다 그 대립되는 것의 부정적인 토대를 제공해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의 한계를 정하고 '우주'를 위한 하나의 새로운 땅을 만들어 차지해 나아간다. 

 ... 판 헤네프는 통과의례를 분리separation 전이transition 통합incorporation의 3단계로 구분했다. 첫번째 단계인 '분리'는 신성한 시공간과 세속적 시공간을 분명하게 구분 짓는다. 그것은 제의적 주체들을 그 이전에 그들이 속해 있던 사회 층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 -특히, 세속적인 사물, 관계, 과정들을 전도시키는 상징적 행위 -를 포함한다. 판 헤네프가 '가장자리margin' 혹은 'limen'이라고 부른 중간단계인 '전이'의 단계 동안에, 제의의 주체들은 일종의 애매성의 시기와 영역, 즉 어떤 결과로 생긴 사회적 지위나 문화적 상태의 속성드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일종의 사회적인 중간상태social limbo를 통과하게 된다. 또 '통합' 혹은 '재통합'reaggregation이라고 부른 세번째 단계는, 그 제의적 주체들이 전체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새롭고 안정되고 분명한 위치로 되돌아감을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현상들과 행동들을 포함한다. 

하나의 사회적 지위로부터 다른 하나의 사회적 지위로 옮겨갈 때에는 종종 한 장소로부터 다른 한 장소로, 공간적 지리적인 이동이 병행되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문을 열거나 두개의 지역을 나누어주는 문간방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때 옮겨가기 전의 지위는 그 개인 혹은 공동체의 제의 이전 혹은 '프리리미널preliminal'한 지위와 관련되고, 옮겨간 다음의 지위는 제의 이후 혹은 '포스트리미널postliminal'한 지위와 관련된다. 

하나의 지위를 떠남과 다른 하나의 지위를 얻음 '사이'에 있는 '리미노이드' 단계는, 하나의 행위주체(그의 꿈들, 환상들, 마음에 드는 독서와 오락)에 대한 비교상징학적 연구에 대해서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리미널'과 '리미노이드'란 용어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회들에서 '리미널한(전이적인)' 위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음식과 배설물과 같은 일반적인 대립항들에 동시적으로 관련된다. '리미널리티' 즉 전이영역의 특징은 여러가지 차이점들을 희미하게 하고 소실시키는 것이다. (무섭..)

 이처럼, 이런 의례에서의 제의적 활동의 주체들은 일종의 '수평화leveling'의 과정을 견디며, 그들의 '프리리미널한' 지위에서의 기호들은 파괴되고 '리미널리티'에서의 '리미널한' 무지위non-status의 기호가 적용된다. 이런 전이 과정 중에, 의례의 참여자들은 가능한 한 획일성, 구조적 불가시성, 익명성 쪽으로 멀리 끌려가게 된다. 리미널리티의 신참자들은 사실상 일시적으로 불확정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들을 구조적 의무들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러나 의례의 참여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는 대신, 특별한 종류의 자유 순수함 유연함 겸손함의 '성스러운 힘'을 획득하게 된다. 이들은 우주론적 체계들을 가장 중요한 관심의 중심 대상으로 삼게 되며,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그 체계들이 규정되고 이해되는 한 그 신참자들은 우주의 한 부분이자 산물로서 의례, 신화, 노래, 비어적 교훈과 같은 언어적 상징 양식들과 무용, 회화, 찰흙 주조, 목조 조각, 가면과 같은 다양한 비언어적 상징 양식들 속에서, 연장자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 이따금 그로테스크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도.. (cf.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리미널리티' 속에서는 친숙한 요소들을 가지고 놀면서, 그것들을 낯선 것으로 변화시킨다. 여기서의 '새로움'은 친숙한 요소들을 일찍이 없었던 양태로 결합시키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1) 리미널 현상은 뒤르껭이 '기계적 연대'라고 부른 것을 가지면서 헨리 메인Henry Maine이 '신분'이라고 부른 것이 지배하는 부족사회와 초기 농업사회에 우세한 경향이 있다. 반면에, 리미노이드 현상은 '계약적인' 관계들에 의해 상호적으로 연대되고 산업혁명에 의해 생성되고 산업혁명을 뒤따라 나온, '유기적 연대'를 가진 사회 속에서 번성한다. 그것들은 산업화 기계화의 시작, 노동의 일용품화, 실제적인 사회 계층의 출현과 함께, 서구 유럽의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음 발전하기 시작한다. (선택성optation은 '리미노이드 현상' 속에 널리 스며들어 있고, 의무성obligation은 리미널 현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리미노이드 현상은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유럽과 아메리카를 지배한 자유 민주주의 사회들을 계속 특징 지웠다. 리미노이드 현상은 혁명 다음의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에 의해서 예시된 구심화된 국가집단주의 체제 속에도 없지 않다. 여기서, 이 새로운 문화는,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휴며니즘을 테크놀로지와 통합하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새로운 문화는 한편으로는 그 테크놀로지적 과정들의 사회 발전적 특성을 제거하고, 그 과정들이 '대중적 재능'에 의해 생성되고 지탱되도록 의도한다. 

(2) 리미널 현상은 집단적인 경향을 띠며, 주기적 생물학적 사회구조적 리듬 혹은 사회적 과정들상의 위기와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 리미널 현상은 이른바 '자연적 전환점들'이라고 불려 질 수 있는 것에서 나타난다. 이 현상은 이처럼 사회문화적 '필연성'에 의해 고무되지만, 새로운 이념, 상징, 모델, 신념을 형성하기 위한 새로운 '자유'와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 리미노이드 현상도 집단적이긴 하지만 이 현상이 비록 가끔 집단적 혹은 '대량적' 효과들을 가져올지라도, 특성상으로 볼 때는 좀 더 개인적인 산물이다. 

(3) 리미널 현상은, 완전한 전체를 형성하고 그 전체의 필연적인 부정성과 가정성을 표상하는 총체적인 사회적 과정 속으로 구심적으로 통합된다. 이에 비해, 리미노이드 현상은, 중심적인 경제적 정치적 과정들로부터 떨어져서, 가장자리들을 따라, 틈새들 속에서 발전한다. 즉 이것들은 그 성격상 복수적/단편적/실험적이다. 

(4) 리미널 현상은, 어떤 공통적인 지적, 정서적 의미를 지니는 상징들이 형성된 이후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면밀히 조사해 보면, 이것은 어떤 집단의 역사 즉 그 집단이 시간적 과정 속에서 겪은 집단적인 체험을 반영한다. 반면에, 리미노이드 현상은 좀 더 특이질적이고 교활하고 특정한 이름을 가진 개인들에 의해서 '학파', 서클, 동인과 같은 특정 집단들 속에서 생성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들은 보편적인 인식을 위해서는 서로 충돌해야만 하고, 처음에는 판매용으로 자유시장에 내놓인 놀이공급물로 생각된다. 

(5) 리미널 현상은 사회 구조의 작동방법에 대해, 즉 사회 구조를 지나친 마찰 없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법에 대해, 표면상으로는 '대립적인'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선기능적인 경향이 있다. 반면에, 리미노이드 현상은 가끔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구조와 조직의 불공평 무능 부도덕성을 폭로하는 서적, 연극, 회화, 영화 등의 사회적 비판 혹은 혁명적 선언들의 일부이다. 

 

...

 

나는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내가 이른바 '커뮤니타스'라고 하는 것도 어떤 '흐름'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흐름'은 그것을 촉발시킬 정해진 규칙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커뮤니타스'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 사이의 언어, 이해의 미소, 그리고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기기와 같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해서 행하는 대화 등으로부터 생성된다.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는 제의가 항상 총체적 사회의 '흐름' 자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제의가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에로의 길을 가게 되자, 이 '흐름' 채험은 주로 예술, 스포츠, 게임, 오락 등 레저 장르들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되었다. 노동이 복잡화, 다양화됨에 따라, 즐겁고 선택 가능한 노동의 등가물, 완화제, 의약, 각종 레저 장르들의 영역도 복잡화되고 다양화되었다. 

 

 

제2장 '사회극'과 그에 관한 '이야기'

 

나는, 인간의 행동을 여눅할 경우에는 '경험의 여러 구조들' 이 기본적인 단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것은 동시에 인지적, 의지적, 정서적 구조인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시에 바라고 느낀다. 사람의 욕망이나 감정이 사람의 사고를 낳고 사람의 의도에 영향을 끼친다

사피어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문화란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더듬거리면서 찾아야 겨우 발견되는 것'이다. 좀 더 덧붙인다면, 어느 정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겨우 발견되는 그러한 것이다. 인류학자가 짊어진 많은 일 가운데에는, 통계나 텍스트로서의 데이터를 구조주의와 기능주의의 방법에 의거해서 분석하는 작업 이외에도, 체험의 여러 구조들을 사회생활의 실제 과정에서 파악하는 작업도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화이트는 스티븐 페퍼Stephen Pepper의 용어를 사용해서 '맥락주의'contextualism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역사적인 장의 어떠한 요소들을 연구의 주제로 포착해낸다. 사건이 일어나는 주위의 자연 공간, 사회 공간 속으로 들어가야

'실'threads'을 추적하는 작업은 "어떤 역사적 영역 전체에서 인식되는 바와 같은 사건이나 추세를 모두 종합하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분명히 '중요성'이 높은 사건이 일어난 좁은 범위에서 보이는 잠정적이고도 한정된 여러 특성들의 연쇄 속에서 어떤 사건이나 추세를 종합하려고 하는 것

 

우리는 지금까지 언어로 이루어지는 이야기 구조의 서로 다른 레벨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상징의 구실을 등한시했다. 특히, 여러 종류의 '역사적 장의 요소'와 '사건'에 관해 주의를 환기할 작정이다. 

 

외부자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기술하는 것은, 체계 외부에 있는 기준을 사용하기 때문에 외부적이다. 내부자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기술하는 것은, 체계 내에서 선택된 기준을 사용하기 때문에 내부적이다. 외부사회(제3세계)를 '설명'하려는 서구인의 시도들은 '자민족중심주의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의 화제를 지껄이고 싶어 하는 언어적 충동은 어떤 공동체에 있어서도 읽고 쓰는 능력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다. 클리포드 기어츠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모든 행동이나 제도는 해석을 위한 언어의 네트워크 속에 싸여 있다. 우리에게는 비언어적인 상징의 네트워크들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서로 연기를 한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며, 평생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역할들을 배우거나, 동경하는 좀 더 높은 층위의 부분 문화들을 배우기도 한다

 

연대기 (응쌍우) - 사건이 본시 일어난 시간적 질서 속에서 다루어지도록 배열하는 것

이야기 (카헤카) - 사건을 다시 하나의 '스펙터클'의 구성요소들로 혹은 사건 발생 과정의 구성요소들로 배열하는 것. 신화, 민간설화, 동화, 전설, 발라드, 민간 서사시 등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동일한 사건이 흔히 그것을 다시 말하는 집단이나 공동체의 생활과정에서 차지하는 '마디결정nodal location'의 맥락에 따라 연대기 혹은 이야기가 달리 틀잡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적 활동이나 사회적 과정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주의를 끄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나 소문의 형식적 장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타인의 사사로운 일에 관한 가십/지껄임/소문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이다. 가십은 언제나 '사회극'과 연결되어 있다. 

사회극은 화이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이야기'이며, 시작의 모티프, 이행의 모티프, 종결의 모티프, 즉 시작 중간 종결이 구별될 수 있도록 되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의 관찰한 바에 근거해서 확신하는 것은, 사회극이란 사회적 과정의 자발적 구조이며 어느 인간 사회에서도 발견되는 만인이 체험하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나는 사회극의 4단계를, 위반breach, 위기crisis, 교정행동redressive action, 재통합reintegration/분리schism이라고 명명한다. 

우리는 스타집단star group이라고 불리우는 특정 그룹에 깊은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으며, 그 집단의 운명이 우리에게도 중대한 관심사가 된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깊이 일체화되는 집단이며, 사람들은 스스로의 주요한 사회적 욕망과 개인적 욕망을 거기서 발견한다. 

각자는 스스로 각 집단의 상대적 가치를 주관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친숙함'에 가치를 두는 집단, '지킬 의무'에 가치를 두는 집단 등이 있다. 많은 비극적 상황들은 각기 다른 스타집단에의 충성심에 대한 갈등에서 생긴다. 각 문화에 있어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어떤 집단에 귀속될 '의무'가 부여되어 있다 -스타집단에 속하는 구성원들 사이에 보이는 관계는 기본 가족 구성원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다. 

사회극은 우선 어떤 규범을 깨뜨리고 어떤 공공의 장에서 도덕법/관습/예의범절의 규칙을 침범하는 것에서부터 그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이 위반이다. 이 위반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익이나 충성심이 흐트러진 것으로 간주된다. 

위반이 가시적인 것이 되면 우선 취소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위반 뒤에는 '위기'가 고조된다. 평화는 공공연한 투쟁이 되고, 숨어 있던 적대관계는 눈에 보이는 것이 된다. 위기의 단계에서는 관련된 사회집단의 현재 내부의 파벌투쟁의 패턴이 드러난다. 그 밑에서 좀 더 덜 견고하고 좀 더 지속적이면서도 점차적으로 변화하는 사회구조가 서서히 눈에 띠게 된다. 이런 위기에서는 이해의 분열과 제휴가 공공연하게 가시화된다. 이렇게 되면, 어떤 조절을 위한 '교정기구' 곧 '교정행동'이 시작된다. 어떤 경우에는, 공적인 제의를 집행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최종단계는 흐트러진 사회집단이 재통합되거나 떄로는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거나 한다. 

 

레이몬드 퍼스Raymond Firth는 '조화적' 과정 구조를 논의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사업'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과정적 구조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어진 사회적 목적에 대해서 행동 및 여러 관계를 질서세우는 과정'이며, 가끔 유형 면에서 경제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cf. 국가예술치료사업?)

사회극은 대체로 정치적 과정이다. 즉 희소가치가 있는 목적 - 권력, 위신, 특권, 명예, 청렴 - 에 대한 특정 방법에 의한 경쟁으로, 희소한 자원 - 물품, 영토, 금전, 남녀 - 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회극의 정치적 측면은 '스타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다. 설득과 선동의 수사학을 예술로 발전시키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해서 압력이나 강제를 행사해야 할 것인가를 터득하고 있고, 정통성의 요구에 가장 민감한 것도 그들이다. 

내가 지금까지 그 형태를 분석한 사회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예술이 삶의 모방이듯, 삶이란 결국 예술의 모방이다. 그 틀은 '시작 모티프'와 '중간 모티프'와 '결말 모티프'로 이루어진 하나의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 몇몇 장르들 특히 서사시는 중요한 정치 지도자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으로서 유용하다. 이런 종류의 '패러다임'은 인식적 세계나 도덕적 세계조차 초월해서 실존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극의 진실이 암시하는 함의나 은유로 표현된다. 

리처드 셰크너가 제안한 이 도식에서, 먼저 왼쪽 바퀴는 '사회극'을 나타내고, 그것의 왼쪽 수평선 위쪽 바퀴는 '현재화된 극', 수평선의 아래쪽 바퀴는 암시적인 수사구조'를 나타낸다. 오른쪽 바퀴는 '무대극'을 나타내고, 오른쪽 수평선의 위쪽 바퀴는 '무대극의 상연', 아래쪽 바퀴는 구조적인 모순을 수반한 '암시적인 사회과정'이다. 이 모델은 유효하기는 하나 어쩐지 나에게는 균형이 편중된 느낌이 든다. 직선상의 움직임이라기보다도 원환상의 움직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폐되는 속성, 암묵적 견본이 반영되어 있지 않음. 그렇기는 하나, 사회극과 문화적 장르 표현 형태 사이의 다이나믹한 연관성을 부각시킨다는 이점은 있다. 

- 이처럼, '사회극'의 승리자들은 그들의 성공을 언제나 정당화해 주는 그런 문화적 수행들 곧 공연들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즉, 배반자/변절자/악인/순교자/영웅/충실한 인물/이단지/사기꾼/속죄양 등이 다 그런 것들이다. 

 

사회극의 세번째 단계에 해당되는 '교정행동'은 '고급' 문화에서나 '민중 '문화에서나 구전문화에서나 문자문화에서나, 문화적 장르의 창조와 유지에 가장 깊이 관계하고 있다. 화해의 제의... 사회의 기층 레벨에서는 규범이나 이해의 대립이 있더라도, 언어적 비언어적인 상징에 의해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포괄적 가치체계를 재확인하고 재활성화 시킨다. '반성성'의 작동. 언어집단이 무엇인가를 음미하고, 그려내고,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바바라 메이어호프Barbara Myerhoff는 '문화적 공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인들은 "우리 자신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반성적이다. 그들은 또 재귀적으로도 된다. 즉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볼 때 우리 자신의 자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의식하는 자아를 알게 된다. 동시에 여기서 우리는 배우이자 또 청중인 우리의 인간적 가능성의 충족, 즉 우리 자신을 보고 우리가 아는 앎을 즐기려는 인간적 욕망의 충족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충분한 형식상의 발전을 이룩하고 충분한 단계 구조를 갖춘 '사회극'을, 여러 '배우들'의 삶에 걸쳐서 분포하고 있는 특정한 가치나 목적을 공유된 또는 합의된 의미체로 바꾸어가는 과정으로 간주하고 싶다. 의미Bedeutung은 기억, 즉 과거를 인식하는 데서 생기며, 과거와 현재 사이의 정합성fit을 에워싼 교섭에 관련이 있다. 그리고 가치Wert는 현재를 정서적으로 즐기는 데에 있으며, 목적Zweck 또는 선Gut의 범주는 자유의지volition에서 즉 미래를 언급하는 의지를 활용하는 힘 또는 능력에서 생긴다. 

교정행동의 단계에서 사회생활의 의미가 사회생활의 이해를 형성하고,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 이해하는 주체로 들어가서 그 주체를 재형성하는 것이다. 

 

반성성은 흐름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반성성은 체험을 분절화하기 때문이다. 삶의 위기 단계에서는 전이적 반성성liminal reflexivity이 필수적이다. 위기는 '조화와 무질서로 이루어진 하나의 카오스'같다. ... 단순하게 공존하는 체험들로부터 '이야기'를 생성하고,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통합을 이룩하는 요인들을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의미 곧 해석은 시간적 과정을 '되돌아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의로부터 연극과 소설에 이르기까지, 어떤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든 주요 문화의 과정들 속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연속관계sequence와 숨겨진 비밀들(창조적 불확정성)' 양자가 다 존재하고 있다. 사회극은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표명하는 우리의 본래적 방식이며, 어디에 권력과 의미가 있으며 어떻게 그것들이 분배되는가를 표현하는 우리의 본래적 방식이다. 

'사회극'이 때와 장소와 문화의 특성에 걸맞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공연들'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장르가 다른 하나의 장르를 생성할 수도 있다. 새로운 정보전달 수단이나 정보전달 매체들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여러 문화적 공연 장르들의 형성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고, 자기 이해의 새로운 양식들의 형성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의식'은 지시하고, '제의'는 변환시킨다. 제의가 '극적'인 한, 제의에서는 사회극의 대립 과정이 간접화되고 일반화되어서 재연된다. 그러므로 제의는 '내용이 빈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감각이 만들어내는 것을 다양하게 섞어 짠 '풍부한 직물'이다. 제의는 '고양적인 것'이다. 

제의는 로빈 호튼이 집단 전체의 일치단결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특징지은 바와 같이, '사회를 위한 일종의 만능 접착제'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 하에서는 그 모든 레벨에서 창조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반 헤넵이 도출한 통과의례의 형식은, 문화 과정의 '직설법'에서 시작하여 문화과정의 '접속법'을 통과해서 다시 '직설법'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는 일방향의 움직임을 가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접속법에는 언제나 '희망 욕망 가능성 또는 가정'의 뉘앙스가 있다고 한다. 

즉 모든 집단적인 의식은 문화적인 허무에 대항하는 문화적 질서에 관한 문화적 호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의는 (의식과 달리) 접속법적인 경계의 심연에서의 현존질서에 대한 변형적인 자기 희생이며, 때로는 질서의 자발적인 자기 해체이다. 

 

호이징아가 말하는 '놀이ludic'의 요소는 많은 부족 제의 속에 충반되어 있다. 상징 매체인 놀이는, 이상한 형태로 결합된 일상생활의 여러 요소들에서부터 기묘한 가면이나 의상을 만들어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그리고 '의미 놀이'에는 가치관이나 사회적 신분의 계층 질서를 전도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대규모화됨에 따라 '리미널리티'에 무엇이 발생했을까? '재전이화'와 '강력한 놀이'라고 하는 구성 요소가 없어진 듯하다. 이러한 제의의 온전성의 붕괴에는 '세속화'가 수반되었다. 전통적인 종교의 제의는, 여가의 영역에 살아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예전의 풍요로운 상징성들과 의미들을 빼앗기고, 놀라운 변형의 힘도 많이 빼앗긴 채, 근대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근대 세계는 '직설법'에 편중되어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전환 이라고 부른 것 속에 우리는 '접속법'에로의 귀환과 변형 능력을 가진 문화양식의 재발견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연극의 몇몇 형식들에서 그것이 이야기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분열은 '재통합'의 전주곡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인 삶 자체가 문화에 매우 유용했던 예전 시기와는 달리, 문화적 의미를 제대로 생성해내지 못하는 시기에서의 '이야기'와 '문화극'cultural drama'은, 포에시스의 책무 즉 문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책무를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제 3장 연극적 제의와 제의적 연극

공연민족지 과정은 민족지를 연극대본으로 바꾸는 단계, 그 연극대본을 공연하는 단계, 그 공연을 메타 민족지로 바꾸는 단계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상적으로 볼 때, 우리는 배역의 한 사람 및 공연되는 문화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논의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직접 참여할 필요가 있다. 

내가 동료 사회학자 알렉산더 얼랜드와 어빙 고프만과 함께 "제의와 연극 사이의 접촉면 ... '사회극'과 '예술극' 사이의 접촉면을 탐구하고" 사회과학과 공연예술의 또다른 경계영역을 탐구하기 위한, 집중적인 워크샵에 리처드 셰크너의 초대를 받았을 때, 나는 실제로 이러한 생각들을 시험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공연performance라는 말은 반드시 형식form 표명이라는 구조주의자의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완성에 이름' 혹은 '완성함'이라는 과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공연하다 라는 말은 어떤 단일한 행위나 행동을 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소간에 내포되어있는 과정들을 '완성한다'는 말이다 .

욕구와 정서는 인지적 순수 본질의 해독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 본질에 근접해 있는 것이다. 

나는 셰크너가 '리허설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대단히 많이 실행하였다. 이 과정은, 시간이 아무리 많이 걸리더라도 본질적으로 극작가 배우 연출가 무대 후원자 사이의 어떤 역동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며, 그중의 어떤 과정이 제일 중요하다는 식의 일차적인 가정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셰크너는 미메시스mimesis보다는 포에시스poiesis를, 즉 !인 체하는 것보다는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배역은 배우를 따라 성장하며 때로는 때때로 자기 폭로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포함하기도 하는 리허설과정을 통해서 올바르게 '창조된다'. 

여러 창조적 행위들이 서로서로를 연결해줌에 따라, 이러한 여러 제스쳐들의 브리콜라주bricolage, 부수 사건들, '자기가 아닌 자기'를 '자기가 아닌 것도 아닌 자기'로 만들기 등이 전체적으로 종합되고, 예술적으로 하나의 '과정적 단위'로 모델화되어야 할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배우는 '개성적인 등장 인물'의 성격을 실현하려고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그 등장인물의 성격에 의해 상상적으로 연기된 배역들을 자기 사회의 실제 인물들(아버지, 사업가, 친구, 애인 등)로 규정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이런 종류의 공연민족지적 연극에서 연극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등장인물 개개인들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의미심장한 여러 과정들이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사회 문화적인 여러 과정드르이 작동과 상호 조우 속에는 실제로 연극이 있다. 이와같은 민족지로부터 공연에로의 이동 과정은 일종의 실용적인 '반성'의 과정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연극학ethnodramatics은 여러 가지 다른 문화/세계관/생활양식 등에 관한 지식이 상당히 증가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공연의 '반성성reflexivity'은 여러가지 속박들을 용해하여 매우 창조적으로 민주화된다. 

공연인류학이 인류학으로부터 그들의 어떤 이론적인 도움을 찾고 있는 연극 공연자들과 조우하려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여러 종류로 분화되고 있는 공연의 장르들은 다양한 레벨들과 다양한 언어적 비언어적 코드들로 일련의 교차적인 메타-언어들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견해가 이미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흐름과 반성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은 공연 장르들을 특징짓는다. 즉, 어떤 장르에서의 성공적인 공연은, 자발적인 행동 패턴과 자의식적인 행동 패턴 사이의 대립을 넘어선다. 

 

제4장 일상생활 속의 연기와 연기 속의 일상생활

'개인적 진실'을 성취하기 위한 윤리적 동기에서 어떤 행동 노선에다 자아를 맡긴다면 이 연기는 본질적으로 진실할 수 있고,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

무엇인가를 감추거나 시치미를 떼기 위해서 '연기를 한다'면 이 연기는 본질적으로 거짓일 수 있다.  = 일상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행동을 하고 공연을 한다는 것, 이것은 정신적인 건강에 필수적인 것이다. 

서구어에서 행동action이라는 말은 또한 논쟁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 연극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문화적 공연의 장르들 속에서, 지위 권력 부족한 재원을 위한 투쟁 등 전쟁과 불화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흉내 내어졌다. 

무대극은 사회에 대한 '사회적 메타주석social metacommentaries'이며, 이 메타주석들은 매우 '반성적'이라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연극들이 자연을 (혹은 차라리 사회와 문화를) 비쳐보는 거울이라면, 그것들은 활동적인 거울이다. 

연극은 아마도 가장 강력하고 활동적인 문화적 공연 장르일 것이다.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어떤 메타 주석적 양식, -- 기어츠가 말하는 계시적인 어구인, '어떤 집단이 그 집단 자체에 관해서 그 집단 스스로에게 말하는 이야기' 혹은 연극의 경우 '어떤 사회가 그 사회 자체에 관해서 행동으로 연기해내는 연극' 같은 양식 - 즉 그 집단의 체험에 대한 해독일 뿐만 아니라 그 집단의 체험에 대한 해석적인 재연기가 없는 사회란 없다. 

레저 영역이 일의 영역과 분명하게 분리되는 복잡한 큰 규모의 사회 속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화적 공연의 장르들이 노동 분화의 원리와 일치하여 생겨나게 된다. 이것들은 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이고, 아마추어이거나 프로이며, 가볍거나 진지하다. 

이것들 모두가 많은 그리스 연극들이 가지고 있는 '반성적 성격'을 다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 중의 많은 것들은 그 고객들이 어떤 특수한 고객들로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전자매체에 의해서 주어지게 된 좀 더 폭넓은 범위의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 몇몇 장르들은 국가적인 경계를 초월하여 전 세계적인 범위에 걸쳐서 주의를 끌어당기고, 사회 전체 혹은 한 시대의 상상력 전체에 불을 지르는 자동조절적인 혹은 자기 비판적인 작업들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들보다 좀 더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마술적인 거울은, 그 안에서 사회적인 문제들 이슈들 위기들이 다양한 이미지들로 반영되고, 각 장르의 전형적인 작동들 속에서 변형되고 평가 및 진단되고, 그리고서는 그 문제의 여러 작은 국면들이 조명되고, 의식적인 교정 행동에 접근하기 쉽게 만들어질 때까지, 그 여러 국면들의 어떤 양상들이 좀 더 세밀하게 탐사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장르로 변화되기도 하는 거울로 이루어진다. ...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추하고 볼품없고 왜소한 것으로 보고싶어 할 사람은 없다. 거울의 반영 및 왜곡들은 반성성을 자극하고 야기시킨다. 

"공연행위는 '알려져 있고/있거나 실천되는 행위' 혹은 '거듭 행위되는 행위', '복원되는 행위'이다. 

공연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중화되며, 이 이중성은 반영과 반성성을 피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인간성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유추의 방법들이, 기교와 테크놀로지로부터 이끌어내어진 유추의 방법들이 오랫동안 물리학적 이해 속에서 해온 종류의 역할을, 머지않아 사회학적 이해 속에서 하게 될 것이다" "사회생활을 이해하기 위해 '연극유추drama analogy'가 필요하다"

 

텍스트 유추text analogy 행동의 제명이 어떻게 발생되며, 그것의 매재들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며, 그 사건들의 흐름으로부터 나온 의미가 무엇에 '정착'되는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회학적인 해석을 수행하게 된다. 기어츠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오늘날의 많은 인류학자들이 문제와 컨텍스트에 따라 '텍스트적 접근법'과 '연극적 접근법' 두 가지를 다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경쟁, 변화, 개인주의 창의력, 혁신을 강조하는, 복합적, 복수적, 계층적, 부족적, 연령적, 성적으로 분리된 사회에서는, 민족적 혹은 범사회적 규모의 일반적인 합의가 획득되기가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사회질서 유토피아 혹은 그밖에 다른 것들의 수많은 모델들, 그 시대의 전형적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다양한 종교적 정치적 철학적 체계들은, 폭넓고 다양한 수사학과 그밖에 다른 설득 수단들을 동원해서 새로이 생성되고 작동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 그러므로 배움, 읽고 쓰는 능력, 논증, 협상, 설득, 적법성을 존중하는 이런 복잡화된 사회에서는, 수많은 주요 '사회극들'이, 무장된 힘에 의해서, '고르디우스왕의 매듭'을 푸는 식'에 의해서, 즉 어떤 복잡하거나 보통 이상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신속하고 간단한 해결책에 의해서 해결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산업화, 도시화된 정치 조직들과 국제 상업조직들로 복잡화되는 과정 속에서, 부족적 봉건적인 사회들의 제의와 법률 과정들을 대신하는 문화적 공연 장르들은, 가끔 좀 더 강력한 정치적 공격에 무력해진다. 

 

셰크너는 연극에 관해 최근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연극은 청관중과 공연자 사이에 분리가 발생할 때 존재하게 된다. 연극의 청관중은 자유로이 공연에 참석할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으며, 만일 그들이 연극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상처를 입는 것은 자칭 청관중이 아니라 그 연극이다. (cf. 우리가 공연물로서의 연극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해서 치명적인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천주고 신자가 '일요미사'에 참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죄가 되기 마련이다)

 

버릿지는 원초의 혹은 원형의 개인에 관한 몇가지 흥미 있는 고찰을 하고 있다. 그는 이른바 '자아self'를 정적인 통로가 아니라 일종의 운동 즉 구조적인 페르소나와 잠재적으로 반구조적인 개인 사이의 진동 에너지로 보고 있다. 

리미널리티 상황에서 대부분의 신참자들은, 과거의 친척 및 체제 순응자들의 압력에 대항하여 제의의 좀 더 분명하고 명백한 면들을 산출해낸다. 이때 나타나는 상징이나 상징적 행동들은 그 체제 순응 압력에 대항한다. 

인간은 '반구조'를 통해서 성장하고 '구조'를 통해서 보호받는다. 

 

전통 사회에서의 연기acting은 주로 역할연기role-playing이다. 여기서 지배적인 개성의 기준, 즉 아이덴티티의 지배적인 기준은 페르소나였다. 그래서 계층적 혹은 부분적 구조들 속에 있는 페르소나들을 형성하는 거대한 집단은 삶과 제의의 양쪽 모두에서 진정한 주역protagonist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일종의 역설적이기까지한 어떤 흥미 있는 '대조적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즉 '페르소나적 일'과 '개인적 놀이'라는 대조적 관계. 전자는 문화의 '직설법' 속에 존재하고, 후자는 '가정법' 혹은 기원법 및 각종 정서와 욕망의 화법들 속에 존재한다. 

연극은 사실상, 보편적인 개인의 영역,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남성과 여성들이 '진정한 자아'라고 부르고자 한 것, 혹은 윌리엄 블레이크가 '남녀의 명확하고 결정적인 아이덴티티를 가진 개인'이라고 부른 것의 영역이 되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거짓되고 환영적인 것은 '페르소나'의 집인 세속적인 세계이고, 진실한 것은 개인의 세계인 연극이다. 연극은, 연극의 인간 존재들을 형성하는 존재 즉 모든 사회구조의 위선적인 행위에 대한 어떤 변치 않는 비판을 표상하는 존재들에 의해서, 그리고 가끔 사회적 계층역할 이미지의 정신적 육체적 훼손에 의해서, 그런것이 되는 것이다.

 

몇몇 '실험극' 양식들은 최근에 들어 실험극의 창조적인 선택으로서의 '연기'와 '무대'를 가지고, 세속적인 현대사회의 '역할연기' 세계 전체를 표현하는 문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러한 역할연기라고 하는 것들은 지루한 하루의 찌꺼기들을 취급하기 위해 가정에 남겨져 있는 가족적 페르소나의 자취만을 가지고 있는 공직/공장/하부계급의 보잘것 없는 페르소나들이다. 

 

'능동적인 문화'란 어떤 작가가 책을 쓸 때 그 작가에 의해서 계발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에 계발했다. '수동적인 문화'는 말하자면 독서, 공연관람, 영화감상, 음악 감상과 같은 능동적인 문화의 산물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연극작품을 준비하는 수년 동안의 연극 작업을 통해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이러한 '능동적인 인간'/'능동적 배우'의 개념에 접근하고 있었고, 거기서의 요점은 나 자신이 되는 것, 어떤 다른 누군가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로토프스키, 트리부나 루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연극을 포기하는 듯해보인다. 연극적인 전통을 포기한 것처럼 나에게는 보인다. (...) '개성'의 개념은 어렵게 얻어진 것이다. 그것을 재전이화reliminalization라는 어떤 새로운 총체화 과정에다가 양도해 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절망적인 생각이다. (...) 역할을 빼앗긴 자아는, 그로토프스키가 무엇인가에로의 '안내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서, 다시 다른 어떤 역할로 변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연극에 관한 논의로 돌아가, 버릿지는 '페르소나'와 '개인'의 차이점을 구분지은 뒤에, 계속해서 '개성'을 음미했는데,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페르소나'와 '개인' 사이의 분명한 전동 혹은 운동이다.